about. 책상의 시간
‘책상의시간’은 책상 앞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의 ‘시작’과 ‘지속’을 조명합니다. 책상 앞에서 쌓인 시간의 이야기로 영감과 용기를 전할게요.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도 삐뚤빼뚤 엉성한 모양이 되고 마는 나에게 디자이너란 동경해 마지않는 직업의 영역. JTBC, 롯데리아, 올리브영 등 국내 유수 브랜드의 브랜딩 작업부터, 뮤지션들의 앨범 아트워크에 진한 취향을 녹여낸 개인 작업까지. 감각적인 시각 언어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펼쳐온 이재민 디자이너. 그는 어떻게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붙들고 있을까.
벚꽃비가 내리는, 아직은 쌀쌀한 봄날의 토요일. 이태원에 위치한 스튜디오 fnt에서 그를 만나 오래도록 축적해온 감각의 레이어들을 차근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디자인은 결국,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맛보며 길러온 감각의 반복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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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 음반 디자인, 페스티벌이나 이벤트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축으로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좀 어렵겠지만 기본적으로 뭔가를 좀 더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중에서 저는 주로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고요.
뭔가를 더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요?
네, 디자이너는 상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인 것 같아요. 거기에 제가 전하고 싶은 태도나 관점을 자연스럽게 얹는 거죠. 미술 작가들은 종종 작업의 메시지나 당위성을 계속해서 고민하거나 스스로 증명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래픽 디자이너는 상대적으로 그런 부담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형 자체를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즐거움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합니다.
어렸을 적 형이 남겨준 LP를 시작으로 음악과 앨범 아트워크에 입문해 ECM, 블루노트 등 다양한 음악을 즐기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젠 직접 그런 멋진 앨범 아트를 직접 제작하고 계시죠. 어떻게 취향이 일로 연결되고 또 일을 취향으로 연결하시나요?
음악가가 자신이 들어온 음악을 바탕으로 연주하고, 요리사가 자기가 경험한 맛의 기억 안에서 음식을 만들듯이,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결국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접한 이미지와 경험들이 지금 제가 만드는 것들의 근간이 되어주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물이 다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받은 피드백이 다시 저에게 돌아오는 흐름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그런 취향을 계속해서 지속해 오실 수 있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보고 듣는 걸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역으로 더 뭔가를 찾아도 보고 디깅도 하며 즐기는 것이 우리 세대가 갖고 있었던 성향인 것 같아요. 음반도 그때는 용돈 받은 2만 원 들고 가서 한 장 겨우 신중하게 골라야 했고 그렇게 구매한 앨범은 반드시 내 마음에 들도록 여러 번 듣고 좋은 부분을 찾아내고 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일본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많이 있었던 편이고요.
일본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많으셨군요.
일본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일본에 사셨었거든요. 숙박이 해결되는 도쿄행 티켓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초기에는 일본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도 다나카 잇코나 가메쿠라 유사쿠 같은 일본 디자이너들을 먼저 접하고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제 디자인의 시작점도 그곳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거기에서부터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던 셈이죠.
fnt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하는 일도 있지만, 개인 작업도 하고 계신데요. 두 가지로 나누어 일을 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fnt에서 진행하는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팀 단위로 이루어져요. 함께할 때 더 효율적이고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일이 많죠. 반면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작업들은 자기 위안이나 자기 증명, 때로는 자기 검열과 비슷한 성격을 띠어요. 제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취향을 계속 확인하고 보존하며 담아내는 그런 용도에 더 가깝습니다.
자기 증명을 위해 개인 작업을 한다는 말이 인상 깊어요.
까먹지 않기 위해 하는 거죠. 그냥 계속 가만히 두면 잊어버리잖아요. 서랍 속에 넣어둔 물건들처럼, 뭐 그런 거죠.
그러면 fnt와 개인 작업으로 일할 때의 모드도 좀 달라지시나요?
꽤 다르죠. ‘이렇게 해도 될까?’와 ‘이렇게 해도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회사의 프로젝트는 구성원들의 집단 지성이 모여 만들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함께 만들고 함께 검토하는 데다 사용되는 범위도 넓기 때문에, 한두 명의 소수가 열광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부드럽게 ‘작동’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아요. 반면, 소수의 사람만 만족해도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는 종류의 작업도 있죠. 작업의 성격에 따라 접근 방식이나 진행 방식을 다르게 설정하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저도 fnt의 작업물들을 볼 때는 좀 더 대중의 눈으로, 디자이너님의 개인 작업물들을 볼 때는 취향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JTBC, 롯데리아, 올리브영 등 브랜드의 이미지 변화를 신선하게 만들어주는데 fnt 스튜디오가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대중성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쉽게 표현하면서 좋은 걸 만드는 게 진짜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약간 자기 기교 같은 거에 함몰되는 일도 저는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개인 작업하실 때는 가벼운 스몰 토크에서 시작하신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요.
사실 좋은 디자인이란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디자인을 이루는 요소들이 서로 잘 맞물려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무작정 예쁘고 멋진 결과만을 기대하며 의뢰하는 분들보다는, 전달하고자 하는 명확한 메시지나 의도를 가진 분들과 함께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훨씬 높죠. 그런 명확한 의도에 제 취향과 생각, 해석이 자연스럽게 더해지면 작업은 더 풍부해지고 의미도 깊어지는 것 같아요.
혹시 작업을 하면서 막히는 구간이 찾아올 때도 있으신가요?
개인 작업은 사실 막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회사 프로젝트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부담감을 느낄 정도로 복잡하거나 어려운 개인 작업은 하기 힘들죠. 개인 작업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는 편이에요. 마치 내 방에서 무언가를 찾는 느낌과 비슷해요. 분명 엊그제 본 것 같은데, 여기 어디쯤 있었던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감각이죠.
물건 찾기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저는 방 안에 있는 물건을 찾아서 쓰는 걸 열심히 할 뿐이에요. 다들 자기 방에 뭐가 있을 거예요. 그게 세대마다 다르고,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나 주변 인물들의 영향에 따라 다른 것뿐이지, 분명 자기만의 재료들이 있을테죠.
내년이면 fnt 스튜디오가 20년 차가 되네요. 20년 차는 10년 차와는 또 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fnt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작했어요.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면 10년 차가 되었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 같아요. 10이라는 숫자가 생각만큼 무겁거나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거죠.
오히려 20년 차가 되니까 고민이 더 드시나요?
20년쯤 전의 일은 가끔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떤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뻔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그 조건들이 생각보다 까다롭죠. 재정적 안정성도 필요하고, 신체적 건강이나 정서적 안정도 모두 갖춰져야 하니까요.
무언가를 오래 지속할 때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죠.
저는 아포리즘 같은 말을 던지거나, 거창한 지향점을 세워 큰 대의를 좇기보다는, 작은 계획이나 목표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궤적이 어쩌면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돌아봤을 때 진짜 의미 있는 건, 그렇게 쌓이고 움직인 흔적들이 아닐까요.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내 작업의 취향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셨는지도 궁금해요.
오랜 시간 동안 취향에 딱 맞는 작업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음악에 비유하자면, 때로는 제가 직접 연주자가 되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프로듀서가 되어 음반을 기획하고 연주자들의 소리를 조율하기도 하죠. 또 어떤 때는 그저 눈 오는 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듯, 이렇다 할 역할 구분 없이 필요한 일들을 함께 해야 할 때도 많아요. 사실 저만 특별히 그런 건 아니겠죠.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맞아요. 일을 하면서 늘 좋은 일만 할 수는 없는 일이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은지 싫은지에 대해서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사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도 많지 않고요. 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두루 경험해 본 결과, 이 일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러니까 덜 싫어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라는 정도의 확신은 있어요.
사람들이 아마 많이 질문할 것 같은데요 좋은 디자이너란 무엇일까요?
좋은 디자이너라는 정의도 저는 사실 좀 어려워요. 돈을 잘 버는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것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이너인가. 사람마다 추구미가 모두 다 다르잖아요. 좋은 디자이너에 대한 기준과 그 대답은 저마다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성공한 인생이라는 답이 각자의 마음속에 다 다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겠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할 때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경우라고 보고요. 그다음으로는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겠죠.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내가 좋은 디자이너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이 디자인이 좋은가, 덜 좋은가’를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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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일을 하고 보니 직업인으로서의 일한다는 말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말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직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어쩐지 겸손해지는 마음까지 든다.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만 생각한다는 마음, 대중과 취향 사이를 오가며 길러냈을 감각들, 내 안의 축적된 좋은 재료들을 선별하고 조합해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의 단련이 20년 차 fnt 스튜디오를, 그리고 지금의 이재민 디자이너를 만들어준 동력이 아닐까. 20년 차를 앞둔 이재민 디자이너가 앞으로 또다시 새롭게 만들어낼 작업들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이재민 디자이너 님의 인터뷰 영상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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