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숙은 걸핏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안면 홍조증을 갖고 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왕따였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친구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한다. 유일하게 편견 없이 대해 준 학교 담임, 서(종철) 선생을 좋아하는 마음을 미숙은 선생님이 되어 서 선생의 동료 교사가 된 다음에도 버리지 못했다.
양미숙이 받는 대접은 대체로 ‘원치 않는 덤’ 취급이다. 학창 시절에 단체 사진을 찍을 때는 아이들 맨 뒤에 혼자 서 있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첫사랑 얘기해 줄까?”라고 물으면 “아니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스토킹에 가까운 애정 공세를 받는 서 선생 역시 양미숙을 떨떠름해한다. 게다가 양미숙은 원래 러시아어 교사였다. 러시아어의 인기가 줄어 러시아어 교사 수를 줄이기 전까지는. 기혼자인 서 선생이 동료 교사인 이유리와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미숙은 서 선생의 딸 서종희와 손을 잡는다.
〈미쓰 홍당무〉의 러닝 타임이 3분의 1쯤 지날 때, 타인들에게 비호감으로 낙인찍혀 살아온 양미숙이 얼마나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이유리 선생에게 음란 메시지를 보내던 평범한 어느 날, 학교 컴퓨터실에서 양미숙은 갑자기 급발진한다.
“너도 내가 창피해서 나랑 같이 공연하기 싫은 거지?”
“선생님도 내가 싫은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애들처럼 나랑 공연하기 싫은 거잖아요, 지금!”
양미숙은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서종희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음 장면에서, 양미숙은 아마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을 말을 종희에게 들려준다.
“세상이 공평할 거라는 기대를 버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돼.”
그리고 둘은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된다.
오랫동안 혼자이기만 했던 양미숙은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유일하게 하소연할 수 있는 대상은 (정신건강의학과도 아니고) 피부과 전문의뿐이다. 양미숙이 서 선생을 좋아하는 마음 역시 피상적이며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양미숙은 이유미 선생을 괴롭히려고 하지만, 이유미 선생은 되레 양미숙을 믿고 따른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조차 못한다. 투명인간처럼 살아온 양미숙은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기댈 수 없으니까 열심히 산다. 오로지 망상만이 그를 자유롭게 한다. 너무 단단하게 자기만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주변 모두를 상처 입히면서도 자신의 상처만 아프게 느낀다. 이것은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인데, 동시에 생애사적 사건들이 중첩된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동정받을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외로움.
영화 속 교복을 입은 종희의 나이일 때 나는 서른이니 마흔이니 하는 나이를 곧잘 권태로운 삶으로 상상했다. 상상 속 삼십 대는 뻔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기득권이었다. 이십 대 후반이면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큰 시험들은 끝이 나서 더 이상 굴곡이 없을 줄 알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커리어의 미래는 더 안개 속이리라는 사실을,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혼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회사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영화를 다시 보다가, 잘 맞지 않는 세계에서 삐걱거리며 살아가는 양미숙보다 내가 어느새 더 나이 들었음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와 내적 싱크가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제법 어른 같아 보였지만, 어떤 것들은 해소되지 못한 채 내 안에 엉망진창의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애타는 노력은 ‘혼자서도 잘 해요’ 타입이 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습관처럼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남들은 내 사정을 모른다고, 말해도 소용없고, 기대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몇 번인가 타박을 들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너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왜 너는 이야기해 주지 않아?” 아마도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내 짐을 지기로 한 이상 변명도 하소연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믿는 연습, 의지하기의 기술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관계가 되기. 내 생각 속 ‘혼자’에 시달리지 않기. 그들이 기댈 때 힘이 되고 내가 기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미쓰 홍당무〉의 후반부에서 볼 때마다 울컥하는 대목이 있다.
“내가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나한테 이러지 않았을 거면서 나한테 다들 이러고.”
울부짖는 양미숙에게 서종희가 외친다.
“선생님, 진짜 왜 그래요? 나는 선생님 하나도 안 창피하거든요!”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경력이 쌓이면서 나는, 내가 선배들을 믿고 의지했던 것처럼 후배들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낡았을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알기 어려운 것이 늘고 있다. 그리고 도움은 때로 앞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로부터 온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옆자리를, 앞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성장이라고 이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도.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혼자’이기보다 가능성 있는 ‘우리’에 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일은, 착실하게 자신을 키워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이 영화가 시작할 때보다 끝날 때 더 성장했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종희를 믿을 줄 알게 되어서는 아닐까. ‘우리’가 함께 클 기회를 주는 것만큼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경험은 또 없으니까.
Writer 이다혜
〈씨네21〉 기자, 작가. 저서로 「출근길의 주문」,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