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명
버금메이킹(Vergum Making)
의미
정연중이라는 내 이름에서 ‘중’의 한자가 ‘버금 중’ 자다. ‘버금’에는 ‘버금간다’는 말처럼 으뜸이 될 수 있지만 겉으로는 으뜸이지 않은 척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이 개념이 한국의 미와 잘 어울린다고 여겨 ‘버금’이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버금메이킹은 버금의 디자인을 제품으로 구현하는 브랜드라는 의미로, 그 뒤에 ‘메이킹’을 붙였다.
탄생 시기
2022년 여름
핵심 가치
유머를 담은 현대적인 굿즈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전통을 오래 이어가는 것.
브랜드 준비 초기에 가장 많이 했던 질문
Q.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스스로 소모된다고 느끼는 일 외에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브랜드를 통해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인가?’ 그리고 ‘어떤 비전이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썼다.
성장 포인트
버금메이킹의 첫 번째 제품이자 대표 상품인 ‘굿럭피쉬’의 성공. 액막이 명태를 현대적인 미감과 기능으로 재해석한 제품으로, 현관문이나 냉장고에 쉽게 부착할 수 있도록 뒷면에 자석을 붙여 편의성을 높였다. 리움미술관 스토어에서 론칭한 후 입소문을 타고 큰 인기를 얻으며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고, 이는 브랜드 성장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버금메이킹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저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회사에서 3년, 이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주로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따른 작업 위주였지만, 언젠가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디자인 스튜디오 ‘버금’도 벌써 15년이 되었네요. ‘버금메이킹’은 버금에서 진행한 디자인을 제품으로 만들어내는(making) 브랜드예요.
독립할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클라이언트 작업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예산 안에서 진행되다 보니, 일이 늘어나면 인력만 더 필요해지는 구조였어요. 또 대중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느낌이 들었죠. 버금에서는 주로 국립박물관, 고궁박물관, 민속박물관 등과 협업하며 한국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상품 디자인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버금메이킹의 방향성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어요.
그 방향성이란 무엇이었나요?
한국 문화와 관련된 작업을 다루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어요.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디자인을 해왔지만, 그것을 디자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점이죠. 금관이나 한복이 매우 훌륭한 디자인인 것처럼요. 서구권이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선점했지만, 디자인의 본질을 독점한 건 아니에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 ‘왜 내가 살아본 적도 없는 북유럽이나 서유럽의 디자인을 따라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전통 시각 자료를 더 많이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문화를 기반으로 디자인 작업을 하는 일이 보다 의미 있고 효율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죠.
버금메이킹의 대표 아이템인 굿럭피쉬의 탄생 스토리가 궁금해요.
이전까지 저희가 선보인 작업은 조상들이 남긴 유물을 도록이나 포스터, 미니어처 형태로 재현하는 방식이 많았어요. 특히 반가사유상 미니어처가 인기를 꽤 끌었죠. 그런데 아무리 잘 팔려도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갈증이 생긴 거죠.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액막이 명태’였어요. 저는 강원도 영월 출신인데, 명태가 대들보에 걸려 있는 모습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거든요. 명태는 다른 말린 생선과는 달리 뭔가 ‘에지’가 있었어요(웃음).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죠.
굿럭피쉬 디자인 개발에만 4년 이상 걸렸다고 들었어요.
처음엔 을지로에서 목공예를 하시는 분께 명태 사진을 보여드리고 나무로 깎아달라고 의뢰했어요. 결과물은 괜찮았지만, 문제는 제가 직접 만든 게 아니라는 점이었죠. 제작비가 높아 가격 경쟁력도 부족했고요. 금속으로 제작하는 시도도 해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러다 3D 조각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어, 학원에서 4개월간 배운 뒤 디지털 방식으로 플라스틱 명태를 완성했어요. 하지만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어떤 건가요?
또 다른 문제는 명태를 감는 명주실이었어요. 실타래로 명주실을 표현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웠거든요. 어느 순간 ‘명태를 플라스틱으로 만드는데, 왜 명주실은 꼭 실물을 써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발상을 전환해 명주실도 플라스틱으로 제작했는데, 이 점이 경쟁 업체와는 다른 차별화 포인트가 되었죠. 개업 선물이나 집들이 선물로 적당한 3만 원 대로 가격을 설정했고, 그에 맞게 소재, 크기, 제작 방식을 설계하며 제품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굿럭피쉬가 좋은 반응을 얻은 순간은 언제였나요?
리움미술관 스토어에 입점을 제안 받았는데, 당시 구비한 3D 프린터로는 하루에 10개씩 제작할 수 있었어요. 이 정도 생산량은 공예품 수준에 불과했죠. 전환점은 한 인플루언서가 굿럭피쉬를 냉장고에 붙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시작됐어요.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고, 대량 생산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결국 금형을 새로 제작해 본격적인 양산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그 시점에서 도전을 포기했다면 굿럭피쉬는 이만큼 성장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네요.
하나의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구현되기까지 정말 많은 과정이 필요하군요.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해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실행력과 제품을 판매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죠. 처음 제품을 만들 때는 크래프트맨십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필수적이에요. 이후 대량 생산 단계로 넘어가도 그 크래프트맨십을 해치지 않게 만드는 게 진정한 기술이고요.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제품의 가치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가의 사치품보다 완성도 높은 상품이 저에겐 더 가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유머러스한 모양의 효자손도 눈에 띄어요.
효자손은 제가 필요해서 만든 아이템이었는데, 디자인 방향성을 잡는 데 큰 영향을 준 건 일본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의 워크숍이었어요. 그는 생각하지 않는 무의식적인 상태, 즉 ‘without thought’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보고 ‘혹시 이거 그거 아니야?’라고 추측하며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영감을 받아 ‘효자손을 낙엽 쓰는 농기구처럼 보이게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디자인을 발전시켰어요.
한국 문화와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우선 효자손이라는 이름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서양에서는 단순히 ‘back scratcher(등긁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이 작은 물건에 ‘효자손’이라는 정감 어린 이름을 붙였잖아요. 이 의미를 현대 사회, 특히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1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과 연결했어요. ‘고양이가 내 등을 긁어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고양이 발 모양의 효자손을 디자인했죠.
자부심을 느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디자인 페어에서 한 할머니가 굿럭피쉬를 보며 “참 잘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져 가는 풍습인데 너희가 지켜줬구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요즘 젊은 세대는 효자손이 뭔지도 모를 수 있거든요. 예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곰방대랑 효자손을 늘 곁에 두셨는데, 이제는 잘 쓰지 않으시죠. 그런데 누군가가 효자손을 “이 이름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대”라며 선물해 주는 모습을 보면, 작은 대화 속에서 우리 문화가 잊히지 않고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제 또 어떤 새로운 꿈을 꾸고 있나요?
10년 뒤에는 멤버들과 함께 건물을 짓고 싶어요. 한옥을 모티프로 하되, 전형적인 외형보다는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공간의 본질을 담는 거예요. 한옥은 은은한 반사광, 유연한 공간 활용 등 빛과 여백에서 오는 감각적인 경험이 그 본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우리의 다음 세대에까지 버금메이킹의 철학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