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differ STAGE
디퍼 스테이지는 책상을 무대로 깊이 있는 배움과 연결을 만드는 오프라인 워크숍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연사를 초청해 데스커 라운지 홍대의 빅테이블에서 사람과 생각이 만나고, 작업과 대화가 연결됩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말간 하늘 아래 부드러운 볕이 뺨을 쓰다듬던 4월의 어느 날. 이날은 정말 피어나는 봄이었다. 일주일의 고비라는 수요일을 지나는 직장인들의 얼굴도 하나 같이 홀가분해 보였고, 골목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꽃과 풀잎도 즐거운 듯했다. 그런데 딱 하나, 지역 정비 사업을 목적으로 전정 대상이 된 가로수들은 예외였다. 이미 가지가 모두 잘린 채 몸통만 덩그러니 서있는 양버즘나무 몇 그루 앞으로는 전정 작업이 한창이었다. 2차선 차도 한 편엔 내 키보다 큰 나뭇가지들이 더미로 쌓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연두잎들을 생생히 매단 채로.
도시 식물들의 양면을 목격한 저녁, 데스커 라운지 홍대에서는 <관찰과 관점, 도시의 식물 이야기>를 주제로 이소영 식물 세밀화가와 함께한 디퍼 스테이지가 열렸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식물의 세계에 흠뻑 빠졌던 90분. 디퍼 스테이지에 참여한 관객들의 얼굴은 밝았다가 심각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식물이 이렇게 강하구나,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식물을 몰랐구나. 강연이 모두 끝난 후, 어쩐지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달라 보였다. 우리의 마음엔 이 아름다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껴줘야겠다는 뭉근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이소영은 식물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소영 작가보다 그의 식물 세밀화를 먼저 알았다. 그는 꽃 하나를 그리더라도 잎의 개수부터 뿌리의 휘어짐, 꽃잎의 결과 꽃받침의 틀어짐, 봉오리의 열림 정도까지 섬세하게 담았다. 이소영의 식물 세밀화를 볼 때마다 경이를 느꼈는데, 그것은 내가 식물 세밀화라는 작업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느낀 감명은 속눈썹의 길이까지 섬세하게 담긴 인물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의 감탄이었으니까. 그런데 식물 세밀화는 예술적 가치를 담은 그림 작품이기 이전에 과학적 기록물이다. 단순히 식물의 외형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구조, 색감, 질감, 성장 과정까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식물 해부도에 가까운 작업이다.
“툴킷에 넣은 식물 세밀화는 서울제비꽃 세밀화예요. 우리나라에만 제비꽃 종류가 50개가 된다는 거 아시나요? 그중에서도 이 서울제비꽃은 서울이 고향인 친구예요. 우리가 사는 서울에서 정말 정말 중요한 식물이죠. 제비꽃은 개미를 통해 번식해요. 제비꽃의 열매 중앙에는 굉장히 단 맛이 나는 요소가 있어요. 개미가 그걸 먹으려고 옮기다가 열매만 쏙 빼먹고 씨앗을 버려요. 그러면 그곳에서 새로운 제비꽃이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비꽃은 개미가 많은 곳에 번식을 잘해요. 식물이 특정한 곳에 많이 분포해 있다면, 그 위치적 특성을 활용해 번식을 하기 때문이죠.”
어느 대상을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은 시야의 확장이나 깊이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관찰은 눈의 감각과 함께 오감을 활짝 열어준다. 바람을 따라 풍기는 향의 근원을 찾아보게 만들고, 식물이 물을 빨아들일 때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의 신체를 그 대상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걸음을 옮기고, 상체를 기울이고, 얼굴을 들이밀고.
“SNS가 발달하면서 시각으로 식물을 감각하는 데 익숙해요. 그래서 우리는 식물 이미지를 본 것만으로 식물을 안다고 착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식물을 제대로 알려면 식물이 있는 곳에 가야 해요. 민들레를 제대로 알려면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는 성의는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식물을 감각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어요. 후각을 이용해본다든지, 수피의 감촉을 느껴본다든지. 저는 식물 세밀화 그림을 그릴 땐 식물을 먹어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잣나무를 그릴 땐 잣나무 씨앗을 먹어보죠.”
단지 감동 어린 시선이 아닌 식물의 관점에서, 식물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식물을 인식할 때 꽃을 보게 되는데, 식물에게 꽃은 생식기관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보는 것이다.
“꽃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매를 맺기 위해서죠. 열매를 맺는 이유는요?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꽃이 향을 내뿜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번식에 도움을 주는 동물과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 특히 화려하지 않은 꽃 중에 향이 강한 꽃이 많아요. 이맘때쯤 많이 나는 향이 뭔지 아세요?”
관객들이 곳곳에서 이구동성 대답했다. “라일락이요!” 향긋한 라일락 내음을 맡은 것처럼 들뜬 그들의 표정을 보니 정말 이곳에 라일락 향기가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몸을 직접 써 가며 계절을 누리는 게 분명했다.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식물은 흔히 볼 수 있다. 보도 블럭 사이에 핀 민들레나, 대로를 따라 심긴 가로수, 건물 앞 화단에 심긴 꽃. 이 녀석들은 콘크리트와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에 색채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나는 마음이 콱 막힐 때면 언제든 도시의 식물을 찾았다.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옅은 실바람이 불어왔다.
“원래 식물은 도시가 아니라 산에 있던 것들이에요. 도시 식물이라는 건, 우리의 필요에 의해 심긴 식물들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도시 식물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성격, 취향이 반영돼요.
먼저 회양목을 이야기 해볼까요? 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에요. 이 친구들은 야외의 가구 같은 존재예요. 관상 목적도 아니고, 공기 정화를 목적에 두고 있지도 않죠. 오히려 어떤 건물의 울타리, 동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요. 회양목은 느리게 자라는 식물이라서 한 번 잘라 두면 그 모습이 오래 유지돼요. 식물이 느리게 자라는 성질을 이용한 거죠. 그런데 자생지에서 자라는 회양목은 3~5m까지도 자랍니다. 도시화 이전에 저희 아버지가 산에서 보고 자란 회양목과 우리가 매일 보는 회양목은 완전 다르게 생겼어요. 그래서 생태 감수성은 세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합니다.”
“도시를 읽는 또 다른 방법은 먹는 식물, 과일과 채소의 흐름을 읽는 거예요. 우리는 늘 같은 채소를 먹는 것 같지만, 도시의 변화에 따라 채소도 모습이 달라져요. 인간이 필요에 따라 개량을 하기 때문이죠. 요즘 사람들은 과일을 택배로 많이 주문하니까, 껍질이 무른 건 안 좋아해요. 그래서 딸기도 단단하게 만들거나 개량을 하는 거예요.”
이소영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당연하게 지나온 일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식탁에 오르내리는 채소가 배송을 거쳐 내 입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개량 과정이 있었을지. 새삼 미안하고 감사했다. 강연을 듣는 관객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때마다 바삐 식물의 이름을 검색하고 노트에 영감을 기록했다.
“은행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예요. 공룡이 살던 시대에도 존재했던, 정말 특별한 나무죠. 그런데 우리는 이 귀한 나무를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여름만 되면 기계로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모두 따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은행나무를 안 좋아할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게 피하는 은행, 술 안주로 사먹잖아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 천년 은행나무를 보러 용문사에 가요.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법이 어떠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천년 은행나무을 사진에 담는 것도 은행나무를 아끼는 방법일 수 있지만, 은행 냄새를 잠깐 참아주는 것도 은행나무를 생각하는 방법일 수 있는 거죠. 이제 곧 5월에 은행나무 꽃이 필 텐데, 그것도 잘 봐주면 좋겠어요.“
이소영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끊임 없이 반성을 하게 됐다. 내가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편견이었구나 싶은 부분도 많았다. 문득 궁금했다. 이소영 작가는 삶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식물의 곁에서 보내며 무엇이 달라졌을지.
“식물 일을 하면서 좋은 건, 사랑하게 되는 게 많아진다는 거예요. 땅을 사랑하게 되고, 내가 자란 고장을 사랑하게 되고,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사랑하게 되고요.
제가 매년 어린이날이 되면 도시에서 거리가 먼 지역의 어린이들을 만나러 가는데요. 한번은 영월에 다녀왔어요.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영월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 있다는 거 아세요? 동강할미꽃인데요. 봄이 되면 이 꽃을 보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와요. 영월은 동강할미꽃이 자생하는 특별한 지역이죠. 그렇게 제가 아는 지식으로 아이들에게 ‘너희가 사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알려주려고 해요.”
작은 식물을 가까이 하면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쑥을 하찮게 여기지만, 어떤 사람은 쑥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해 노벨상을 받았어요. 이게 식물을 어떻게 얼마나 관찰하느냐의 차이예요. 우리는 하찮게 여기지만, 누군가는 그걸 들여다봐서 인류를 구한 거죠. 주변 식물을 사랑하면 우리의 일상을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
동시에 식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비기득권층,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의 시선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에 산불이 크게 났잖아요. 산불이 크게 번진 원인을 두고 소나무 송진 때문이라는 뉴스가 정말 많았어요. 그 논리가 완전 틀렸다고 볼 순 없겠지만, 저는 답답했어요. 우리의 잘못으로 불을 내고서, 소나무 탓하는 게요. 또 이번에 많은 언론에서 문화재 훼손을 가장 큰 비극으로 다뤘는데요. 그러나 우리는 산을 그 이상으로 이해해야 해요. 자연과 대지로서의 산을요. 이 산에는 어떤 동물과 식물이 서식했는지, 그 존재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보도하는 곳은 없는 게 아쉬웠어요. 무언가를 볼 때 문명과 도시 안에서의 시야에 그치지 않고 지구적으로 넓히면 좋겠어요.”
글에 전부 담지 못한 수없이 넓은 식물의 세계가 오갔다. 이 식물은 원래 어떤 특성을 가졌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사실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어떤 꽃은 기후위기 때문이 아니라 겨울에 실수로 피기도 한다는 이야기. 그동안 식물을 멋대로 가여워하고 안쓰러워 했던 내가 떠올랐다.
“식물은 약하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오히려 고정되어 있고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지능적으로 강한 생물이에요.” 이소영 작가의 이 말은 내내 가슴에 남는다. 인간과 말이 통하지 않고 움직일 수 없기에 인간에 의해 쉽게 훼손되지만, 그럼에도 식물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오래 살아남은 존재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겸손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자리를 지켜준 식물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밤.
differ 팀은 식물을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 하나로 모인 관객들을 위해 작은 꽃다발을 준비했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작은 응원과 애정을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 사시사철을 지날 때마다 오늘의 이야기가 기분 좋게 떠오르기를. 그래서 봄을 지나 다가올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 더욱 기대되기를.
✱ 이소영 식물 세밀화가와 함께 만든 디퍼 툴킷 다운받기
𝗖𝗮𝘀𝘁 이소영
𝗗𝗶𝗿𝗲𝗰𝘁𝗼𝗿/𝗠𝗼𝗱𝗲𝗿𝗮𝘁𝗼𝗿 Hyeyoon Chung
𝗣𝗵𝗼𝘁𝗼 & 𝗩𝗶𝗱𝗲𝗼 Sanghee Kim
𝗘𝗱𝗶𝘁 Seulgi Lee
𝗗𝗲𝘀𝗶𝗴𝗻 Jaehyung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