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곰팡이 핀 반찬을 정리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류지현 디자이너 역시 같은 경험을 했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 셰어하우스에 살았어요. 친구 4명과 냉장고를 함께 썼는데, 음식물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가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유통 기한이 불과 하루 지난 멀쩡한 스테이크를 포장도 뜯지 않고 버리는 경우도 봤죠.“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기술과 정보 탓에 오히려 식품을 낭비하게 되는 아이러니. 류지현의 고민은 흥미로운 사회적 디자인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Save Food from the Fridge)’는 냉장고에 꼭 보관해야 할 식품만 넣어두고, 이외의 식재료는 밖에 보관하자는 캠페인이다. 그는 캠페인을 위해 ‘지식의 선반(knowledge shelves)’이란 도구도 디자인했다. 사라져가는 전통적 음식 저장 기술을 연구한 후, 식재료의 특성에 맞게 제작한 상온 보관 도구다. 냉장고로부터의 독립 선언은 세계 곳곳의 환경 단체와 연구자들에게 큰 영감과 호응을 일으켰다.

‘지식의 선반’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사명감으로 그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자연의 힘으로 음식을 저장하는 문화를 더 깊이 알기 위해, 부엌과 텃밭, 공동체를 찾아다니는 여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의 기록은 2017년 출간된 책 〈사람의 부엌〉에 자세히 담았다.

여행은 깨달음을 남겼다. 현대적 기술이 우리 삶을 ‘안으로’ 가둔다는 사실이다. 곳간이나 찬장에 보관하던 식재료는 냉장고에 넣고, 베란다에 말리던 옷은 건조기에 넣는다.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일상은 특히 그렇다. “텃밭이 없는 도시, 원룸이나 아파트에서 실천하기에는 물론 한계가 있죠. 하지만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는걸요.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가는 게 중요해요. 자연환경을 관찰하고 경험하며 쌓은 지혜로 문제를 풀어나갔던 과거의 태도와 같아요.”

류지현은 우선 ‘오픈하는 습관’을 제안한다. 냉장고로부터 식재료를 꺼내 직사광선 없는 그늘에 보관하는 게 시작이다. 주방을 오가는 사이 식품이 눈에 들면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시장에서 꼭 사야 하는 게 무엇인지도 더 분명히 알 수 있어, 재료를 지나치게 구입하는 경우도 적어진다. 집에서 요리하는 빈도와 나의 생활 패턴을 이해하고, 장보기 횟수를 정하는 등 식습관에 맞춤한 소비를 반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삶을 위한 데이터베이스가 그렇게 구축되죠. 그 후엔 냉장고의 사이즈를 줄여 나가는 등 점차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가면 돼요.“ 류지현은 큰 결심보다 숨 쉬듯 스며드는 변화가 오래간다고 믿는다. ”식습관 정착은 요가와 비슷해요. 낯선 동작에 익숙해지면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자세가 나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