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입사했을 때 사수도 없고 매뉴얼도 없었다고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하고 동공 지진이 일어났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 공채 교육을 받고 드디어 회사에 첫 출근해서 조직장님과 일대일 면담을 하는데, “민석 님이 맡으실 일은 지금까지 우리 조직에서 아무도 한 적이 없다”며 “혼자 터득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러나 여기는 학교가 아니니까 배우는 곳은 아니니 알아서 잘해 보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말이야. 그때 우리 팀원이 17명이었는데 나만 기획자였고 다 백엔드 서버 개발자였어.
아찔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네요. 맨땅에 헤딩인 상황에서 길을 잃을 법도 한데, 어떻게 업무 일지를 쓸 생각을 했어요?
입사 전에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가게’에서 인턴을 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법을 많이 배웠어. 당시 내 멘토가 업무 기록하는 걸 일러주셨거든. 그땐 에버노트로 기록하곤 했어. 조직장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이거부터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 ‘신입의 패기 + 혼자라는 위기감 + 그래도 해내고 말겠다는 오기’가 더해져 뭐든 붙잡는 심정으로 기록을 시작했어.
다이어리나 스케줄러를 써도 되고 기존에 썼던 에버노트를 계속 써도 됐는데, 노션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일단 난 다이어리를 끝까지 써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보다 정리벽이 있거나 계획적인 사람도 아니라 다이어리는 못 쓰겠더라고. 매일 컴퓨터 앞에 있으니 디지털 플랫폼이 더 편하기도 했고. 당시 여기저기서 노션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들려서 그냥 ‘나도 한번 써보자’ 한 거야. 그런데 노션을 쓰면서 에버노트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노션만의 매력에 빠졌고, 그 이후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지.
노션만의 특장점은 뭔가요?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검색할 수 있다는 거야. 에버노트는 구조 자체가 컴퓨터에서 폴더 관리하는 거랑 똑같아. 그런데 노션은 ‘다중 선택’을 통해 태그화해서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있어. 예를 들면 내가 노션 검색창에 ‘기획서’를 검색해 볼게. 그동안 내가 진행했던 기획서 관련 업무들이 쫙 펼쳐지지? 노션은 무척 구조적인 프로덕트라 여기서 특정 시점이나 페이지도 선택할 수 있어.
선배, 업무 일지는 언제 기록하나요? 어떻게 기록하는지 보고 싶어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이미 만들어진 틀이 있어서 일과를 적는 데 5분도 안 걸려. 자, 한번 보여줄게. 이걸 보드뷰라고 하거든? 이 판 자체가 보드야. 2021년 한 해 동안 작성한 업무 일지인데, 이렇게 일 년이 이 보드에 다 담겨.
가장 먼저 분기를 기입해 주면 돼. 1년은 4분기, 각각 석 달씩이니까 12~13주가 이 안에 담겨 있게 되는 거지. 분기 후엔 주차별 카테고리를 만들어주면 돼. 날짜는 [week N] 202X.XX.XX-XX.XX 이렇게 기입해 주고 클릭!
이렇게 주차별 워크 템플릿이 만들어졌어. 그러고 나면 이 밑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짜를 넣고 날짜별로 오늘 해야 할 업무들을 기입하면 돼. 일주일을 단계적으로 볼 수 있는 구조야. 그날 하루 해야 할 업무를 일반적인 투 두 리스트처럼 적으면 돼. 예전에는 주별 목표도 적곤 했는데, 이제 그 형식은 사용하지 않고 이번에 새롭게 시도한 게 바로 이 개구리야.
개구리요?
“아침에는 살아 있는 개구리 반찬을 먹어야 한다”라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이야기지? 서양 속담인데 ‘제일 하기 싫은 일을 아침에 몰아서 하라’는 뜻이래. 이 문장으로 업무의 우선순위를 결정짓는 기준을 바꾸게 되었어. 시간 순으로 투 두 리스트를 작성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장 하기 싫은 일을 적고 개구리 이모지를 옆에 둬서 개구리가 날 쳐다보도록 만든 거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는 걸 엄청 귀찮아하는데, 그런 일을 일부러 업무 시작하자마자 오전에 마무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참 신기한 건 별것 아닌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사소하지만 귀찮은 일들을 출근하자마자 완수하다 보니까 업무 생산성이 좋아지더라고.
업무 일지를 기록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게 뭐라고 생각해요? 효율적인 시간 관리? 우선되는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된 것?
이거 두 개 다 받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으니 업무 평가 시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더라고. 그러나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힘’이 생겼다는 거야. 설사 내가 한 업무의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내가 노력한 걸 내가 알고 있잖아? 그래서 실망하기보다는 다음에 더 잘하자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 나를 향한 믿음, 자신감이 생긴 거지. 쉽게 무너지지 않을 힘을 얻은 것 같아.
기록을 쌓아가면서 이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선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읽는 시간을 가진다면서요?
방식이 계속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기록을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회고를 하고 있어. 처음엔 일기처럼 주절주절 감정 위주로 썼는데, 지금은 주 회고, 분기 회고로 자리 잡았어.
주 회고와 분기 회고는 어떻게 다르게 진행하나요?
먼저 주 회고는 매주 일요일 밤에 진행해. 일주일간 내 기분 그래프를 정리하고, 이번 주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경험한 모든 일, 아쉬웠던 일, 큰 영감을 준 이야기나 문장을 25분 정도 다시 한번 정리해. 분기 회고는 당연히 주 회고보다는 오래 걸려. 1시간 30분 정도 걸리더라고. 분기 회고는 보다 더 큰 주제로 나를 되돌아보는데, 이를테면 한 분기 동안 내가 한 것과 잘한 것, 배운 것과 성장 지점, 아쉬운 것과 다음에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다음 분기에 나에게 올 기회 등을 토대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곤 해.
노션에 기분 그래프도 있어요?
특정 기호들로 내가 만든 거야. 이런 식으로 하니까 진짜 그래프처럼 보이지 않니? 이 감정을 따라 이번 주에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적으면서 한 주를 정리하는 거지. 노션은 이렇게 원하면 자유자재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
회고하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예요?
최근에 회사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팀원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어. 이때 팀원들이 해준 말을 써놓았지. 회고하며 내 칭찬이 담겨 있는 걸 다시 보니까 웃게 되고, 그 이유가 디테일하게 적혀 있으니까 이번 발표는 어떤 걸 잘했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더라.
반대로 ‘이불킥’한 상황도 있었을 텐데, 이때 회고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회의하다 화가 나서 운 적도 있고, 발표를 완전 망쳤던 적도 있어. 질문이 막 날아오는데 답변을 제대로 한 게 없고. 당시는 쪽팔리고 부끄러울 수 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에피소드더라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부끄러울 때는 더 남기려고 노력해. 성장이라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이전의 나랑 달라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오히려 이런 이불킥 상황들을 복기하며 내가 부족한 게 무엇이었는지, 다음에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보완하게 되더라고.
기록을 통해 ‘힘’이 생겼다고 하셨어요. 회고는 선배에게 어떤 걸 전해 줬나요?
나에게 집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회고는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줬거든. 회고를 하면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곱씹어볼 수 있게 돼. 뭘 채워야 할지도 알게 되고. 기록과 회고가 연결되어 있어서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채워주는 것 같아.
선배의 말을 듣고 나니 저도 용기 내서 업무 일지를 기록해 보려고요. 저 같은 입문자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처음 입사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1년 동안 배운 게 평생 내 일의 기반이 된다’는 거였어. 그래서 나도 신입 시절에 배우고 듣는 모든 걸 잘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기잖아. 기록하는 곳이 노션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곳이 될 수도 있어. 뭐가 됐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겨놓으면 너의 미래를 잘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모든 변화는 기록에서부터 시작되니까.
Interviewee 김민석
엔씨소프트 서비스 기획자이자 일 기록자로 불린다. 노션으로 업무 일지를 작성한 지 3년째. 그의 노션 업무 일지는 많은 직장인의 업무 가이드가 되어주며 기록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