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0.1의 추지원, 추지영 자매는 주로 어린아이를 그린다. 그간 우리가 보던 어린이의 고정화된 이미지가 지워진, 표정 없는 얼굴의 어린아이를 그린다. 0.1은 아이들이 무언가에 집중할 때 무표정해지는 얼굴에서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읽었다고 한다. 흰 도화지, 새 책상처럼 그들의 비어 있는 민얼굴 너머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다. 억지로 귀여운 표정이나 손가락 하트 포즈를 짓지 않아도 되는 0.1의 아이들은 소설 〈아몬드〉의 표지 그림을 비롯한 외주 작업, 동명의 자체 브랜드 제품들 속에서 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아이들은 네 개의 손으로 완성된다. 언니 지영이 몸과 동작 같은 전체를 그리면, 동생 지원이 표정이나 머리 모양 같은 세부 묘사를 완성하는 식이다. 독특한 공동 작업 방식에 대해 정작 두 사람은 별스럽지 않아 하는 눈치다. 학창 시절, 미술 과제를 할 때 온 가족이 모여 다 같이 작업했던 경험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지금의 분업 방식으로 굳어졌다. 둘은 드로잉뿐 아니라 실크스크린 인쇄, 재봉 등 여러 제작 공정까지도 ‘자매 수공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마치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이 자매의 공통분모는 예상보다 영역이 넓다. 함께 애니메이션과 그림책을 탐독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나란히 대학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전공했으며, 2013년부터 지금까지 공동의 이름으로 작업과 생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자매는 좋아하는 것, 관심사, 취향까지도 비슷해 빈티지와 아날로그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마저 공유한다. 특정 주제, 한 가지 아이템을 깊이 파고들어 수집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마음이 닿는 것들을 사 모으는데, 신기하게도 둘의 마음이 서로 다른 사물을 향한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매의 수집품들 사이에는 느슨한 공통점이 있다. ‘낯설고, 작고, 오래된 존재’라는 것이다. 본래 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 쓸모가 희미해진 것, 이를테면 주사위와 로또 셰이커, 전선 방향 전환기 같은 것들에 자꾸 마음이 기운다고 한다. 판매자조차 기능을 모르는 물건, 끝내 용도를 알아내지 못해 미스터리로 남은 것들도 여지없이 둘의 장바구니에 담긴다. 이 사물들의 내력을 추리하는 시간, 새로운 용도와 기능을 상상하는 일은 예상보다 재미있고,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 0.1의 제품을 만들 때도 10년 후 모습까지 생각해 본다거나 다른 기능, 소재를 제품에 대입하며 아이디어를 확장해 나가는 것은 이 무용지물들의 새로운 소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이 1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수집해 온 하나의 품목도 있다. 수집가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흔한 아이템일 수도 있는 우표다. 둘에게도 관심 밖이었던 우표가 평생의 수집품으로 등극하게 된 건 회현 지하상가에 있는 우표 가게에서 어느 크리스마스 우표를 만나면서부터다. 우표 54장이 이어져 완성되는 한 폭 아름다운 성탄절 풍경을 마주하고서 둘은 우표도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아이’와 ‘크리스마스’, 두 가지 주제로 전 세계 우표를 10년 넘게 수집했다. 발행 시기는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발행 국가는 대륙을 넘나든다. 그렇게 개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우표를 모았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우표는 그 자체로 레퍼런스다. 더더군다나 0.1은 이야기를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하는 작업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림 우표는 구체적인 참고 자료가 된다. 또한 책갈피, 스티커, 카드지갑 같은 작은 문구와 굿즈를 만드는 메이커로서는 우표의 작디작은 네모 칸 안에 빼곡한 밀도와 완성도를 목격할 때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담는 틀과 형식도 만들기 때문에 평소에도 독특한 소재나 제작 방식을 관심 있게 봐요. 우표는 그림도 멋지지만 종이 재질이나 인쇄 기술도 무척이나 훌륭하거든요.” 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두꺼운 책에 담긴 그림을 볼 때와는 또 다른 환기, 오히려 더 생생한 영감을 얻는다.
평소 알고 지내던 디오브젝트와 함께 책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을 때, 0.1은 애지중지 모아온 우표들을 떠올렸다. 두 스튜디오는 ‘Add to Cart’라는 이름의 공동 브랜드를 만들고, 지금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첫 책은 예정대로 〈Postage Stamp〉였다. 수집한 우표를 하나하나 스캔해 작은 판형의 책에 담았고, 우표 최초 발행 시 기념 봉투가 함께 제작된다는 점에서 착안해 초일 봉투도 만들었다. 구성품 중 독자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권당 한 장씩 제공되는 실제 빈티지 우표다. 0.1은 그간 수집한 우표들을 독자들과 기꺼이 한 장씩 나눠 가지기로 했다. (〈Postage Stamp〉는 뛰어난 만듦새를 인정받아 한솔제지가 주최하는 인스퍼어워드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두 번째 책 〈Moving Numbers〉 역시 0.1의 수집 시리즈 중 하나다. 책의 주제는 “평소에는 정지해 있으나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숫자 오브제”다. 주사위와 로또 셰이커처럼 사람의 손에 닿아야만 움직임을 갖게 되는 숫자 오브제들을 모아 소개한 책이다. 0.1은 수집한 물건들을 이따금 한 번씩 꺼내서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데, 그 과정에서 물건들 간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 공통점을 가진 사물을 더 모으기 시작한다. 마음 닿는 대로 모아온 갖가지 숫자 관련 물건들 가운데에서 ‘움직이는 숫자’라는 주제를 길어 올리고, 추가 수집을 통해 주제를 심화시키고, 이어서 제2의 창작물로 확대한 사례가 바로 〈Moving Numbers〉인 것이다. 이 사례는 분명한 이유나 명분 없이 수집을 시작했더라도 꾸준하게 모으는 행위,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뒤늦게나마 자신만의 화두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Catch Book〉이라는 제목이 붙은 0.1의 새 노트 제품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을 붙잡으러 가자!’ “생각에 형태가 있다면 그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형태가 아닐까 한다.”며 말을 거는 이 노트는, 그 생각들을 붙잡기 위해 떠난 한 소년의 짧은 여정을 담고 있다. 이 문장은 0.1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노트의 마지막에는 공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있다. 새 노트를 받아 든 지금, 아직은 무슨 공이 바구니에 담길지, 그 바구니가 어떤 모양일지 모르지만 일단 0.1은 붙잡으러 떠날 것이다.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몰라 더욱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수집의 세계, 가능성이라는 미지의 세상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