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책상의 시간
‘책상의시간’은 책상 앞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의 ‘시작’과 ‘지속’을 조명합니다. 책상 앞에서 쌓인 시간의 이야기로 영감과 용기를 전할게요.
김태리 디렉터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해온 브랜드 전문가다. 그중에서도 ‘파리의 우리 집’이라는 뜻을 가진 패브릭 브랜드, ‘쉐누아파리’는 그녀가 5년간 가장 애정을 쏟아 키워온 브랜드였다. 2023년, 정성 들여 만들어온 쉐누아파리를 매각한 뒤 그녀에게는 다시 처음이 찾아왔다. 다시 0으로 돌아와 처음을 마주했을 때, 그녀가 선택한 건 새로운 무언가가 아닌 오래도록 자신을 기쁘게 했던 일들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다시 책상 앞에 앉은 그녀를 만났다. 10년 전과 지금,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만 그때와 똑같지만은 않을 시작. 김태리 디렉터는 지금, 어떻게 또 한번의 시작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이번 인터뷰는,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용기와 태도에 대한 기록이다.
쉐누아파리와 이별한 뒤, 최근 다시 새로운 브랜드를 시작하고, 또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며 그간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파리의 무드를 선물하는 패브릭 브랜드 쉐누아파리를 5년 동안 운영하다가 2023년 아파트멘터리에 매각했어요. 오래 함께했던 쉐누아파리와 이별하고 나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의 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도 하고, 여행도 다녔어요. 20대는 온통 일에만 매진한 기억뿐이라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 시기는 정말 0의 단계로 돌아간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네, 그래서인지 사실 올해의 컨셉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다’예요. 쉐누아파리를 매각하고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넥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초심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작년 11월, 뉴욕에 다녀온 뒤에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 결정하게 됐죠. 대신 새로운 걸 하기 보다 내가 했던 것들 중 가장 재미있었고, 행복했던 것들을 하기로 했어요. 제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다시 새롭게 초심의 마음으로 준비 중인 브랜드가 굉장히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네, 5개의 브랜드를 새롭게 운영하거나 준비하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받아 원단 일을 오랫동안 하셔서인지 저 또한 원단을 좋아해서 쉐누아파리 인수인계가 끝날 무렵, 패브릭 브랜드인 포니 프레스 클럽을 만들었어요. 주얼리를 추가할 계획이라 현재는 리브랜딩을 준비 중이고요. 제스티 라이프라는 이너뷰티 브랜드는 6월 초 공식 론칭될 예정이고, 이외에도 하우스 소월이라는 티 브랜드와 스튜디오, 캔들 브랜드 오픈을 준비하고 있어요.
5개의 브랜드라니요. 카테고리도 너무 다양한데요. 이렇게 다양한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어렵진 않으신가요?
브랜드가 여러 개라서 어렵거나 힘든 건 없어요. 제가 만드는 모든 브랜드의 기본은 지속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매출을 위해 만들어진 브랜드가 아니라 제 삶 속에 늘 가까이 있는 것에서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모든 브랜드의 중심에는 제가 있죠.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이너 뷰티 브랜드를 만들게 됐고, 20대 때부터 차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만드는 모든 브랜드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말이 참 인상 깊어요.
원래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뿌리까지 찾아보고, 디깅하며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브랜드를 만들 때도 아예 제 것으로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오랜 경력을 갖고 계시지만 예전과 지금의 시작은 또 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데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하며 느껴지는 차이가 있으신가요?
일단 시대가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어플부터 소통하는 모든 방식들이 5, 6년 사이에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감을 잡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쉐누아 파리를 만들 때 저는 20대 후반이었고, 지금은 30대 중반이니까 그 시간의 차이도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10살, 12살 어린 팀원들을 많이 채용해서 그 나이 또래 친구들의 라이프스타일이나 밈 등 트렌드를 공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반대로 이미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제는 너무 많아 알아버렸죠.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도움이 될 때가 많지만 오히려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저도 모르게 자꾸 리스크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리스크를 생각하게 되면 재미가 없어져요.
재미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안전하게만 하려고 하는 거예요. 회사의 매출, 회사의 이익이 중요해 기존의 성공 방식만 유지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면 재미가 없어지죠.
얘기를 듣다 보니 디렉터님이 제일 재미있다고 느꼈던 경험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요.
쉐누아파리를 운영할 때 한국에서는 촬영을 안 했어요. ‘파리의 우리 집’이라는 컨셉답게 파리에 있는 작은 에어비앤비, 친구가 사는 집 등을 섭외해서 발로 뛰어다니며 콘텐츠를 만들었어요. 쉐누아파리 피드에는 단순히 룩북만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집을 보여주었죠. 저는 이 포인트가 사람들이 쉐누아파리를 좋아하고, 9만 명의 팔로우가 모이고, 잘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판매나 매출만을 생각했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액션이었죠.
정말 신기하게도 소비자들은 그런 디테일이나 진심을 아는 것 같아요.
판매만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브랜드는 순간적으로 매출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찐팬을 만들기는 쉽지 않죠. 소비자들이 계속해서 봐야 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하니까요.
브랜드 디렉터로서의 일은 쉐누아파리를 하며 시작하신 건가요?
사실 쉐누아 파리가 시작은 아니었고요. 15년 전에 친이모가 남대문에서 물건을 사입해서 가게를 하셨었는데 그때 이모를 따라다니며 도매의 세계를 알게 됐죠. 그 당시, 그러니까 스무 살에 원래는 뮤지컬을 전공했었는데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주얼리 온라인 몰을 만들며 시작했어요. 쉐누아 파리는 그 이후에 프랑스 에펠탑이 보이는 친구 집에 오래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이 집에 산다면 필요한 게 뭘까라는 생각으로 커튼이나 작은 물건들을 만들게 된 게 시작이었고요.
뮤지컬을 전공하셨어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네요!
대학교 때 뮤지컬을 전공했어요. 1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면서 내가 제일 잘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막상 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11명 중에 꼴찌인 것 같더라고요. 내가 무대 위에 진짜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애초에 안 되는 싸움에 달려들기보다는 직접 내 무대를 만들어 돈을 벌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스무 살이면 어린 나이였는데 내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처음에 좀 막막하지는 않으셨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점이 있는데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냥 지금 하고 싶으면 해봐야지만 해소가 되니까,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하고 싶다’ 이 마음이 전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나 다양한 브랜드를 또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건가 봐요.
15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봤을 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었는데요. 그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성실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성실히, 열심히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뭐라도 도와주려 하시고, 소개시켜 주려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거든요.
성실함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태리 님에게 성실하다는 건 뭘까요?
매일 스스로에게 할 일을 주고 그 할 일을 군말 없이 하는 게 성실함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투덜거리거나 불만을 말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하기로 했으니까 한다, 해야지도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한다. 그게 성실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무 살 때부터 스스로 나만의 무대를 직접 만들며 태리 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에게 스스로 선물해 주는 방법을 이미 너무 잘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못하는 일까지 욕심내지 않아요. 자존감이 높은 편인데, 진짜 안될 것 같은 일은 시도도 하지 않죠.(웃음)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생기면 이 마음을 믿어줘요. 누구나 잘하는 일이 하나씩 있잖아요. 그 마음을 믿는 거죠. 대신 내가 잘하는 일과 남이 더 잘하는 일을 빨리 구분해 팀을 만들어 일해요. 일찍이 일을 시작하면서 필요한 동료를 찾는 법을 알았던 것 같아요.
하나의 제품을 브랜드로 탄생시키는 과정은 어떤지 궁금해요.
평상시에 폴더별로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이미지 아카이빙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 판매를 하면 좋을지 시장 조사를 하고, 분석하고, 고민하는데 2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나서 바로 로고, 라벨, 스티커 등 브랜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직접 디자인해요. 이후에 어떤 제품을 만들지 구상하고, 마케터분들이 투입되어 제품의 USP를 고민하죠. 하지만 마케터분들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아요. 내가 생각하는 이 브랜드의 매력과 매칭되는 부분이 있을지를 체크하기 위함이죠. 고집스럽더라도 내가 생각한 대로 해보자는 생각을 많이 해요.
고집스럽더라도 내가 생각한 대로. 브랜드다움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스몰 브랜드는 큰 브랜드와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좀 더 러프하게 시작을 해도 괜찮거든요. 시장에서 먹힐만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있더라도 조금 더 내 방식대로 해볼 수 없을까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브랜드 전면에 나서는 디렉터는 아니기 때문에 항상 저보다는 브랜드가 앞에 있지만 제가 만든 브랜드를 봤을 때 누구나 제가 만든 것 같다. 김태리 답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김태리 다운 건 뭘까요?
솔직한 브랜드. 숨기는 게 없는 브랜드요. 그래서 어떤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게 브랜드에 대한 가이드도 자세히 만드는 편이에요.
그간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며 실패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쉐누아파리를 운영할 때 맨투맨을 처음 만들었는데 한 장도 못 팔았어요. 진짜로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패션 쪽은 나랑 맞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이후에 아파트멘터리에 잠시 입사해 일했었는데, 그때는 아예 컬렉션으로 꾸려 패션 브랜드처럼 전개해 다시 한번 도전했어요. 왜 실패했었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공부했죠. 그러니까 판매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한 번 실패를 했는데도 또다시 정면 돌파하셨네요!
뭘 실패했다고 남기는 걸 싫어해요. 기왕이면 ‘다시 했는데 되더라고’라는 말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그간 그렇게 많은 실패를 했어도 다시 시도하면 웬만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기도 했었고요.
실패는 계속 쌓이면 성공이 되나 봐요.
네 맞아요. 어떤 일이든 당연히 처음에는 실패를 할 수밖에 없잖아요.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죠.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잘 되는 사람은 1% 밖에 안되잖아요. 그런데 실패를 하고 나서 나는 이래서 아닌 것 같고, 못하겠다는 얘기를 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어떻게 하면 그 1%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실패를 계속 쌓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랜드를 만들 때 현실적으로 자본에 대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궁금해요.
브랜드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버티는 힘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력도 무시할 수가 없죠. 현실적으로 판매가 되지 않더라도 버티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어느 정도의 비용까지는 없는 돈이라는 셈 치고 투자할 수 있을지, 그만큼의 돈을 만드는 것, 스스로 비빌 언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대부분 3, 4개월 차에 그만두는 이유가 돈이 돌아야 되는데 그 시기에는 돈 안 돌거든요. 투자한 돈이 모두 바닥났을 때 대부분 잘 돼요. 그렇기 때문에 투자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해두고 돈을 바짝 벌어 자금 관리를 잘 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죠.
최근에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브랜드를 만드는 시작의 단계에 있는 분들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네 좀 뻔한 말이지만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브랜드는 나를 잘 알아보려고 하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야지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수 있어요. 두 번째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손 내미는 용기입니다.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람과 일할 때 시너지가 나는지를 알고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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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새로운 시작 앞에 선 김태리 디렉터는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에 솔직하게 손을 들어주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길을 택했다.
그녀는 다시 0으로 돌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이 시간들이 쌓여 새롭게 태어난 브랜드는, 언젠가 제2의 쉐누아파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출발선 앞에 용기 내어 다시 선 사람들을 향해 그녀는 말한다.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면, 나를 탐구하려는 용기부터 꺼내어보라고.
모든 시작은 결국, 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 김태리 디렉터 님의 인터뷰 영상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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