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책상의 시간
‘책상의시간’은 책상 앞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의 ‘시작’과 ‘지속’을 조명합니다. 책상 앞에서 쌓인 시간의 이야기로 영감과 용기를 전할게요.
대중에게 사랑받는 영화나 드라마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하 ‘OST’)도 뜨거운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이야기의 호흡과도 같은 OST는 때론 캐릭터 그 자체를 설명해 주기도 하고, 캐릭터의 성장과 감정을 세밀화로 그려내는 힘을 품고 있다. 그리고 영상이 끝나고 나서도, 작품 밖으로 흘러나와 우리 일상의 BGM으로 활약하는 음악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의 책상은 어떤 드라마를 품고 있을까. 수많은 인물들의 대사와 표정과 정적이 지나갈 때 몇 번이고 정지 버튼을 누르고 악상을 떠올려야 할 이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영상 속 미세한 움직임과 생활사운드 사이에 침투하여, 이야기가 나아갈 징검다리를 놓는 모습. 음악가의 책상 역시 고유한 드라마를 쓰는 중이지 않을까.
<스카이 캐슬> OST ‘We All Lie’의 작곡가로도 알려진 최정인을 만났다. 최근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과 <환승연애3> 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으며 더욱 역량을 펼치고 있다. 그의 책상은 파도가 들이치는 연안처럼 이야기로 가득했다가 금세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한다. 고요와 격변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찾는 과정은 어렵지만, 그래도 길을 잃진 않는다. 음악을 하는 이유는 언제나 음악 속에서 찾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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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책상의 존재감이 엄청나요. 딱 봐도 메인 책상임을 알겠는걸요?
네, 맞아요! H.R Ton의 midi keyboard desk HR-L1R 제품을 커스텀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음악 장비 설치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께 부탁드렸죠. 상단의 큰 모니터는 의뢰받은 프로젝트의 영상을 보면서, 캐릭터의 감정을 따라가는 시간을 갖기 위해 설치했고요.
몰입에 최적화된 환경을 위한 곳이라 그런지 정돈이 잘 되어있다는 인상이 들어요.
꼭 필요한 것만 두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책상이 검은색이다 보니까, 하루를 시작할 때도 이곳 먼지를 닦아내는 것부터 하게 되고요.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작업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 분야에서 창작하시는 분들에겐 다소 산만한 생활 습관이 있을 거란 선입견이 있잖아요. 정인 님의 공간은 그 상상이 완전히 편견이라는 깨달음을 줍니다. (웃음)
예전에, 방 한 칸에서 작업하며 지냈을 땐 저도 정확히 그 상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어요. 물건이 여기저기 어질러진 상태. (웃음) 물론, 그땐 일부러 어지럽히긴 했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면 사운드 녹음을 할 때 소리가 지나치게 울리기 때문에. 그런데 단지 그 이유로 정리하지 않고 지내면, 마음이 너무 심란해지더라고요. 오히려 이렇게 비워진 채로 있을 때, 채우고 싶은 욕구도 생기는 것 같고요. 그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저는 음악을 만드는 에너지로 전환해보는 거예요.
일단 비우고, 그다음 채우기. 어쩐지 오늘 대화의 중요한 힌트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서 명상과 요가를 좋아하시는 걸까요? 음악 장비만큼이나 집안 곳곳에 자주 보여요.
맞아요.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안 좋은 습관이 많이 개선됐어요. 요가를 하면 몸을 풀게 되잖아요? 제 안에 쌓여 있던 묵은 감정이 정말 많은데, 힘든 마음이나 피곤함이 점점 숨과 함께 녹으면서 릴렉스돼요. 그게 저를 비우는 과정인 것 같아요. 비운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고, 제가 ‘영감’이라 느끼는 순간도 바로 이때인 것 같아요. 음악적인 감각하고도 잘 붙거든요. 음악과 나의 감정, 신체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요.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음악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게, 흐름을 감지하고 따라가는 게 제 방식에 가깝습니다.
작업 루틴도 굉장히 건강한 방식으로 자리 잡혀 있을 것 같아요.
규칙적인 루틴을 따르는 편은 아니에요. 작업은 늘 같은 자리에서 하지만, 그 흐름은 그날의 감정이나 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한 음도 안 나올 때가 있고, 반대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이 열리듯 곡이 쏟아질 때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루틴’보다는 ‘열릴 준비가 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요가나 명상,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일도 그 준비의 일부예요.
음악을 만드는 일이 책상에 앉아서만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거나, 차를 내리거나,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듣거나 하는, 그런 모든 순간으로부터 스며드는 감정들이 음악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니까. 집에 있든 밖에 있든, 혼자 있든 누군가랑 있든 상관없이 저는 항시 ‘on’ 모드예요.
그래도, 그래도, 곡이 정말 안 써지는 날엔 어떡하나요?
그럴 때 많죠. 그럴 땐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전 영상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 영화를 보는 게 가장 큰 자극이 되더라고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감동이 여전히 정말 크거든요. 저절로 ‘어서 곡 쓰고 싶다’ 하면서 에너지가 차오르는 거죠. 당장 책상 앞에 가서 건반을 누르고 싶어질 만큼. 그러니까, 책상 앞에 오래 있고 싶으면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책상으로 언제든 달려가기 위해 언제나 열릴 준비를 한다는 게, 강박 없이 작업하기 위한 탄력적인 태도인 것 같네요. 굉장히 유연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어떤 창작자는 고집스러울 만큼 스스로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 작업을 해내기도 하잖아요? 감독님은 그런 유형의 창작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저는 매일매일 곡을 써야 하는 사람이에요. 강박이 없을 순 없어요. 프로젝트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일정한 아웃풋을 내야만 하는데, 시간은 정해져 있죠. 그저 해내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잘 만들고 싶고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항상 있지만, 늘 어떤 한계 속에서 운용해야 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경우도 많아요. 왜 더 잘 만들지 못하는지, 이 정도 연차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기준들이 제게도 있습니다. 유연함을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잘했으면 할리우드에 갔겠죠? (웃음) 음악과 함께한 시간이 이십 년이 넘었고 지금의 일을 이어온 건 십 년이 되었지만, 책상 앞에서 저도 생각이 많아요.
고려해야 할 게 역시 많군요.
영상 음악을 한다는 건, 혼자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과의 감정 교류, 신뢰를 쌓는 과정을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 일을 둘러싼 환경을 스스로 잘 만들고 지켜야만 했어요. 곡을 쓰는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아는 것이고, 동시에 집단 안에서도 나 자신을 믿어보는 힘을 잃지 않는 것이죠.
‘열릴 준비’라는 게, 저는 그저 자유롭고 강박 없이 일하는 자세라고만 예상했는데 더 깊은 배경이 있었네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책임감 안에서 마음이 좁아지더라도, 마음을 계속 열어보려는 의지가 있어야겠어요.
‘이 직업이 나랑 맞나?’, ‘잘하고 있는 걸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게 되고 눈에 띄는 결과가 당장 없더라도, 작업은 이어져야 하니까요. 제 기준에서 좋은 음악을 만들었는데 끝내 빛을 보지 못했을 때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음악감독을 맡았을 때도 설렘이 압박감으로 바뀌면서 스스로에 대한 검열도 심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을 늘 떠올려요. 처음을 기억하는 거죠. 이 일을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잡히던 날. 처음으로 큰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장면들을 경험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머무는 음악을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인 것 같아요. 그 마음이 중심을 잡게 해주거든요. 저에게 지구력이란 끝까지 버티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괜히 음악까지 미워지는 날엔 어떡해요?
그런다 하더라도, 다시 음악으로 치유받아요!
감독님 음악으로요? (웃음)
네, 물론 제 음악으로 저도 치유받아요! 에디터 님이 제게 메일로 알려주셨잖아요. <나의 해방일지> 보고 나서 ‘Not a Thing’이랑 ‘Someone’을 무한반복하며 서울을 걸어 다녔다고. (웃음) 사람으로 상처받는 날도 있겠지만 이렇게 사람 때문에 제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사랑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고 음악과 일상 사이에서 부단히 균형을 잡느라 에너지가 많이 들겠어요. 왜 감독님의 공간이 이렇게 환하고 여백으로 가득한지 알 것도 같아요. 메인 책상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시간을 갖는 감독님 모습이 그려지네요.
서브 책상은 조남인 디렉터님이 디자인해 주시고 StudioEAEA에서 제작해 주신 테이블인데, 실제로 제가 이 테이블에서 보낼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들어주셨다고 해요. 여기선 식사를 주로 하고, 노트북 작업도 하면서 개인적인 사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개인적인 사유는 어떤 게 있을까요? 아무래도 ‘영상 작품을 위한 음악’을 만드니 곡 작업을 할 때도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상을 투영하기 어려울 것이고, 음악가로서 사적인 얘기를 꺼내고 싶은 생각도 종종 드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작품을 위한 음악은 감정을 설계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캐릭터에 너무 감정적으로 붙을수록 그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너무 멀어져도 시청자의 마음이 닿지 않는데요. 그래서 늘 한 발짝만 물러서는 연습을 하죠. 그 균형을 지키는 게 이 일의 미덕이라, 어느 순간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남기고 싶어질 때가 와요. ‘INNI’가 바로 그런 마음에서 시작된 개인 활동이에요.
그래서 제게도 첫 앨범 [The Little Girl]이 아주 자전적인 이야기로 느껴졌나 봐요!
INNI는 아이슬란드어로 ‘내면의’라는 뜻이에요. LOVE INSIDE, INNI. “사랑은 우리 내면에서 시작되고, 늘 그 안에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어떤 시절의 감정이거나, 내가 몰입했던 순간 혹은 사랑했던 나의 일부 같은 것들을 담아내는 작업인데요. [The Little Girl]은 그래서 제 내면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 맞아요. 어쩌면 제 안의 어린 내가 꺼낸 첫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네요!
의미는 ‘내면’을 뜻하지만 어쨌든 감독님이라는 사람이 ‘표출’되는 방법인 것 같아서, 그 묘함이 빚어내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 활동명을 자주 쓰실 것 같나요? INNI로서의 다음 행보도 궁금해요.
시간만 된다면 하고 싶고, 지금도 다음 앨범을 기획하는 중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첫 번째 앨범과 마찬가지로 제 안에 있는 감정이나 어떤 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할 수도 있는데요. 요즘 요가와 명상에 빠져 있다 보니 제가 듣고 싶은 요가 음악, 명상 음악을 앨범으로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제 흥미가 닿는 음악 주제는 워낙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좋아하는 음악들의 경향성이 있으니, 조금 더 스스로도 연구해 보고 제 색깔을 입혀 결과를 내보고 싶어요.
역시 기대됩니다. 끝으로,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The Little Girl]의 앨범 커버 속 소녀는 감독님 본인이신가요?
접니다, 저 맞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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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는 마음이 있다. 최정인 감독에게 그 대상은 음악이었고, 마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책상 앞으로 건반 앞으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배운 것은 사랑, 슬플 땐 슬플지언정 멈추지 않도록 하는 힘이다. 음악 공부의 첫걸음을 뗀 이십 년 전과 영상 음악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십 년 전의 최정인은 다른 상황의 사람이겠지만, 음악이라는 커다란 이름 앞에선 같은 조건의 사람이기도 하다. 비워내고 비워내도 차오르는 그의 모든 움직임은 여전히 음악에서 출발하고 음악으로 도착한다.
기쁘고 슬픈 모든 에너지가 집결하는 곳, 최정인의 책상. 이곳에서 한 음 한 음이 태어나고 쌓이는 선율을 상상하면, 그의 자리가 끝없는 오선지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생각이 든다.
✱ 최정인 음악감독의 인터뷰 영상으로 보기
𝗖𝗮𝘀𝘁 Jeongin Choe
𝗘𝗱𝗶𝘁 Haeseo Kim
𝗩𝗶𝗱𝗲𝗼 & 𝗘𝗱𝗶𝘁 Sanghee Kim
𝗣𝗵𝗼𝘁𝗼 Chanwoong Jeong
𝗗𝗲𝘀𝗶𝗴𝗻 Jaehyung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