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differ column
디퍼 칼럼은 필진마다 3회 차에 걸쳐 하나의 주제를 풀어가는 연재물이며, 책상에서의 몰입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 배움, 창작, 일 등에 대한 심층적인 사유와 정보를 전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뇌를 자극할 때, 기분 좋은 깨우침이 일어날 거예요.
오독오독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 권의 책을 각자의 방식대로 ‘오독’하면서, 문장 하나와 단어 하나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선 나는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간절하게 궁금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를 채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게 가능한 깊이로,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어간다면 나는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기운이 났다. 나의 오랜 책상 위로 읽고 싶은 책들이 쌓였다. 그 옆으로 새 노트가 펼쳐졌다. 여기엔 생각이 쌓일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한 이국의 도시에 도착한 것처럼, 나는 그 풍경 앞에서 이상할 정도로 벅차올랐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공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텅 빈 바닥을 박박 긁으며 사는 느낌은 오래되었다. 갈급한 마음에 책을 계속 읽긴 했지만, 제대로 읽을 여유도, 깊이 읽을 체력도 시간도 없어서 늘 허기가 졌다. 내 내면에 더 이상 퍼 올릴 물이 없는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서 살아내는 그 느낌은 정확히 공포와 맞닿아 있었다. 광고 회사에 다니며 동시에 작가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끝없이 창조해 내야 해야만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 느낌을 ‘공포’ 이상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그 공포를, 내가 스스로, 책을 읽으며, 물리칠 기회가 나에게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제대로 잡고,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나의 메마른 우물, 내가 기어이 채워 넣고 싶었다. 그렇게 매달 한 권의 책을 사람들과 함께 오독오독 씹어 먹고, 그 책을 제대로 씹어 먹기 위해 또 다른 책들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그랬더니 내가, 우리가 쑥쑥 자라났다. 놀라웠다. 이 나이에도 성장할 수 있다니. 책과 함께라면 그럴 수 있다니. 이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소중한 배움이 있다. 여기서 슬쩍 맛보기로 소개해 볼까?
똑같은 책을 다섯 번을 읽었다. 잘못 읽은 게 아니다. 정확히 다섯 번이다. 오래전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크게 충격을 받아서 다 읽자마자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서 읽은 적이 있다.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꼼꼼히 다시 읽었다. 그런 책이 여럿이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다섯 번이나 읽는다고? 그건 나도 처음이었다.
오독오독 북클럽의 첫 책인 토니 모리슨의 <재즈>. 내가 오래도록 사랑해 온 책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북클럽의 대장인 내가 제대로 소화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줘야만 했다. 다섯 번을 읽었다. 놀라운 사실은, 다섯 번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스르륵 정체를 밝히는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며 노트에 그 문장을 옮겨 적었다. 흥분하며 북클럽 사람들에게 그 문장의 의미를 알려줬더니, 모두 나처럼 입을 딱 벌렸다.
그때 알았다. ‘오독’의 의미에 ‘5독’이라는 의미도 숨어있다는 것을. 한 권을 깊이 읽기 위해서는 다섯 번은 읽어도 되는 거였다. 시간도 없는데 언제 다섯 번이나 읽냐고? 그럼 좋아하는 책이 나타났을 때 두 번 정도 읽는 여유를 부리는 건 어떨까? 반복되는 독서는 책 근육을 길러준다. 마치 트레이너가 근육을 위해 무자비하게 “5번만 더요!”라고 외치는 것처럼, 나도 외쳐본다. “한 번만 더요!”
독서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사실 좋은 독서는 그 책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독서로 또 연결되기 때문에 어디서 끝나는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는 어디서 끝나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독서의 끝은 ‘쓰기’에서 끝나야 한다.
좋은 책을 한 권 읽고 좋은 느낌 정도를 간직할 수 있다. 그래도 된다. 여러분이 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을 한 번 읽고 그 책에 대해 끝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래도 된다. 하지만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은 느낌 정도에 안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낌은 허망하다. 구체화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도 그 정체를 확신할 수 없다. 느낌은 불성실하다. 현실에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얼마 가지 않아서 휘발된다.
북클럽 사람들에게 늘 ‘여러분의 오독 일기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한다. 읽고 나서 한 줄이라도 그 책에 대해 써보자는 거다.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을 리는 없다. 어떤 부연 느낌이라도 남는다. 귀찮지만, 뭘 이런 거까지 하나 싶지만, 그걸 붙잡아다가 모니터 위에, 휴대폰 메모장에, 노트 위에 옮겨보자는 거다. 나는 언제나 나의 비법 하나를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신기한 건, 쓸 게 아무것도 없다 싶어도 쓰면 뭐라도 써집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똑같은 간증을 사람들에게 듣는다.
‘진짜 신기해요! 쓰면 뭐라도 써지네요!!!’ 이 반응을 보면서 가장 뿌듯한 건 언제나 나다.
몰랐다. 독서란 내 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씨앗을 싹 틔우는 일이라는 것을. 심지어 ‘오독오독 북클럽’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씹어 먹다 보면 나의 가난한 정원에 수많은 색상의 수많은 모양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이 정원은 내가 만든 정원이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정원이 내 오랜 책상 위에 생겨났다. 나는 책을 햇빛으로 삼아, 글을 비료로 삼아, 수많은 사람들의 오독을 물줄기 삼아, 이 정원을 잘 가꿔볼 생각이다. 언젠가 당신도 이 정원에서 만날 수 있길.
The End.
✱
🖋️ writer. 김민철 @ylem14
20년 동안 광고 회사를 다니며 ‘일룸’의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오독오독 북클럽 운영자이자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정형의 삶⟫, ⟪내 일로 건너가는 법⟫, ⟪모든 요일의 기록⟫ 등의 책을 썼다.
𝗘𝗱𝗶𝘁 Haeseo Kim
Illustration Eomju
𝗗𝗲𝘀𝗶𝗴𝗻 Jaehyung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