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수화 아티스트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
Q.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예술을 업으로 삼을 때 흔히 떠올리는 질문이고,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답을 찾았다. 예술과 생계를 분리해서 바라보면 된다. 예술가인 지후트리가 먹고살기 힘들면 인간 박지후가 먹여 살리면 된다. 어떤 형태로든 생산 활동을 하면 되는 거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잃지 말아야 한다. 자부심을 갖되 불필요한 자존심은 부리지 않는 것.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다. 두 자아를 동일시하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돈을 못 벌지?’라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돈이 나와 내 작업을 좌우하는 것은 싫다.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부정적인 피드백에 매몰되지 않는 것.
수화 아티스트 ‘지후트리’로 활동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수화 아티스트는 수어를 기반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는 사람이에요. 저는 주로 그림을 그리고 퍼포먼스 작업을 하죠. 지후트리는 아티스트로 활동할 때의 이름이에요. 친구들이 제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름 뒤에 나무를 의미하는 ‘트리’를 붙였죠. 지후트리라는 이름으로, 수어가 다른 문화와 만났을 때 어떤 형태로 발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어요.
‘수어’보다 ‘수화’라는 표현이 좀 더 익숙하지만, ‘수어’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다고요.
2016년에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어요. 이 법이 의미하는 건 영어, 한국어처럼 수화도 하나의 언어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한다는 뜻의 ‘화(話)’가 아닌, 언어를 뜻하는 ‘어(語)’를 붙인 거죠. 수화도 다른 언어와 같은 체계를 가진 동등한 언어라는 점에서 ‘수어’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제가 스스로를 ‘수화 아티스트’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손으로 말하는 ‘손소리꾼’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 화(畵)’를 써서 제 주요 표현 방식 중 하나인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청인이지만 농인의 언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고 있어요. 수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면역력이 매우 낮아진 상태에서 음악을 들으시다가 한쪽 청력을 상실하셨죠. 아버지처럼 저를 돌봐주던 외삼촌도 화재 사고로 한쪽 팔을 소실하셨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장애라는 것이 먼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그 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서울에 올라왔는데, 점점 꿈이 아닌 돈을 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마인드 맵을 그렸는데, 가족에 관한 키워드가 정말 많이 나오더라고요. 제 손에 관한 키워드도 있었어요. 손이 크고 통통한 게 늘 콤플렉스였거든요. 그 가운데서 찾아낸 교집합이 수화였고, 이것을 매개체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콤플렉스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무엇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던 건가요?
제가 손이 큰 편인데, 수어를 할 땐 장점이 되더라고요. 멀리서도 잘 보이니까요. 어머니와 외삼촌이 장애를 받아들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계속해서 나아가시는 모습에 용기를 얻기도 했어요. 가족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네요.
수어를 직업과 연결한다면 수화통역사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수어를 다른 분야가 아닌 예술에 접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외적인 부분이나 성격 면에서 제가 가진 에너지 자체가 강렬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을 예술과 연결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수의 문화가 대중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며 세상의 균형이 맞춰지는 거라고 생각해서, 예술을 통해 그 균형을 잡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화가, 세상이 다양해지는 거니까요
그림과 퍼포먼스,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각각의 작업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요?
작업에 앞서 스토리텔링을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이야기가 견고하지 않으면 작품이나 작업이 가벼워 보일 수 있거든요. 길면 3주, 짧으면 1주 정도 걸리죠. 그다음은 표현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림의 경우에는 그리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컬러 위주로 사용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바닥에 물감을 깔아 놓고 눈을 감은 뒤 손에 자연스럽게 집히는 색으로만 그림을 그려요. 그러면 더 다양한 색깔을 관찰하고 그에 맞는 형태를 그리게 되거든요. 퍼포먼스를 짤 때는 조형학적인 측면을 고려해요. 저마다 몸에 가진 도형들이 많거든요. 이를테면 손을 허리에 짚을 때, 팔과 몸 사이 공간이 삼각형으로 보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찾아서 퍼포먼스 안에 녹이려고 해요.
퍼포먼스는 주로 관객과 대면한 상태에서 펼치게 되는데요. 퍼포먼스를 선보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단어가 사람이 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할까?’ 이 질문을 가장 많이 해요.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내가 진짜 그 단어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감정에 집중해서 퍼포먼스를 하고 내려오면 대부분의 관객들 눈가가 촉촉해져 있어요. 그러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작년에는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했고요.
전국 장애인 체전에서 개막식 퍼포먼스를 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장애인들이 주인공인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기뻤고, 끝나고 잘 봤다는 응원의 멘트도 많이 들었어요. 청각 장애 환우들을 위해 수술 기금을 모금하는 공모전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데, 제가 대상을 탔거든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그 의미가 남달랐어요. 작년에는 삼성전자 광고에 댄서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국악 밴드 ‘악당광칠’의 음악에 맞춰 수어를 표현했는데, 감회가 새로웠죠. 상업 광고에서 수어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수어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던 것 같아요.
‘2021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에서는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 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상이에요. 수상 이후 보도자료 누리집을 봤는데, 제 이름 앞에 ‘수화 아티스트’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거예요. 제가 걷고 있는 길을 나라에서 인정해 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고 작년 한 해 동안 열심히 활동했다는 증거 같아서 더욱 기뻤어요. 제가 활발히 활동할수록 이 문화가 더 널리 퍼지는 거잖아요. 저로 인해 수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 뿌듯해요. 저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농인 아티스트분들도 있고요.
수화 아티스트를 직업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요?
세계가 계속해서 확장된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저는 청인이니까 농인의 문화를 100%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더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죠. 때로는 그 부분이 단점이 될 때도 있어요. 역차별의 문제라고 할까요? ‘네가 뭘 안다고’, 이런 반응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런 피드백이 있을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나요?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들의 말을 전부 포용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농인의 언어를 청인의 시각에서 청인에게 전달하는 사람이에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왜 이 예술 활동이 이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설득해야 하죠.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만 피드백을 수용하려고 해요. 물론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죠.
농인와 청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는 게 쉽지 않겠네요.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구상에 나란 사람은 단 하나라는 것. 그것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 안의 빛나는 부분을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돈이 뭐가 중요해요. 마음이 부자인 게 진짜 부자죠.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공감해 주는 사람이 생겨요. 그런 믿음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좋겠어요.
수어를 바라보는 인식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기를 바라나요?
수어는 손으로만 이야기하는 언어가 아니에요. 얼굴 표정, 입 모양, 온갖 제스처까지 다 포함된 언어이거든요. 코로나19 이후로 수어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된 이유는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기 때문이었어요. 가령 ‘가능하다’는 단어를 표현할 때 입 모양을 벙긋 해야 하는데 마스크 때문에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마스크가 투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투명 마스크가 출시됐죠. 저는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아요. 우리가 말할 때 얼굴 표정과 제스처를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하듯, 수어도 동일한 체계를 가진 언어라는 것만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 하나의 인식이 정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 거예요.
수화 아티스트로서 그리고 있는 미래가 있다면요?
언젠가 지후트리라는 이름의 장학 재단을 설립하고 싶어요. 저처럼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나 농인 아티스트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게 저의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