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큐레이터 집단.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
Q. 제약 없이 오롯이 나만의 기획을 펼쳐보일 순 없을까?
송고은 하나의 주제의식을 가진 신생 큐레이터들의 공간이 생겼다가 2~3년 내에 사라지는 일이 너무 많았다. 대관이 아닌,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마음껏 기획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큐레이터들에게 너무나 필요하다.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장혜정 어떻게 각자 큐레이터의 개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지양한다.
웨스(WESS)는 장혜정, 송고은 두 큐레이터가 함께 시작한 집단이자 전시 공간입니다.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장혜정 ‘WE Show Separate’의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어요. 해외에서는 큐레이터들이 함께 운영하며 전시를 보여주는 공간이 많은데, 국내에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어요. 작가들에 비해 큐레이터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동료들끼리 모여 개인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과 시스템을 생각했죠.
송고은 콜렉티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가치관을 이뤄내려는 모임은 지양해요. 콜렉티브는 2~3년 지나며 쇠퇴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거든요. 좀 더 지속가능한 프로젝트로 남기를 원했어요. 모든 환상은 뒤로하고, 공유 오피스 같은 개념으로 시작했죠.
다른 멤버들은 웨스에 합류할 때 이런 고민에 공감하셨던 건가요?
이성휘 저는 지금까지도 다소 관조하는 입장이에요. 그럼에도 참여한 이유는 동일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큐레이터로서 활동하며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주로 작가들이었어요. 정작 속 깊은 얘기들을 하고 지내는 사이의 큐레이터는 없었죠. 전시 기획의 경우 사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기 어렵거든요. 직업으로 삼은 후 상하관계에서 배우는 게 전부죠. 동료들로부터 배우고 싶었어요.
김성우 전시 관람객들은 결국 작가와 작업을 봐요. 큐레이터가 판을 짜고,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고, 펀딩도 하는데 말이죠. 미술계 안에서는 큐레이터가 너무 잘 보이는데 관람객 입장에서는 안 보이는 거예요. 큐레이터들끼리 작은 공간에 모여 실험할 수 있는 공간, 서로 이야기할 기회만 생기길 바랐어요.
이규식 처음 제안 받았을 때 이미 웨스가 2년 정도 운영되는 걸 지켜본 시점이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응했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제게도 전시를 기획하고 보여즐 공간이 너무 필요했으니까요.
신지현 큐레이터는 섬처럼 일하는 직업이에요. 각자 기획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외부에서 흥미로워할 기획이 연속해서 열리는 공간을 운영해보자는 이야기가 제 마음을 끌었어요. 멤버의 다음 전시가 무엇일지 항상 궁금해하는 마음이 혼자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가끔은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끔은 감동받지요.
웨스에는 현재 총 11명의 멤버가 있습니다. 꼭 11명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장혜정 공간에 대한 생각이 먼저였어요. 사대문 안은 아니더라도 서울의 중심지이기를, 어느 정도 작은 규모의 전시라도 모자람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랐거든요. 각자 부담 없이 지속적으로 월세에 쓸 수 있는 금액과 지역 시세를 비교해 계산하니 10명에서 12명 사이라는 숫자가 나왔어요. 그 즈음 이곳의 임대 공고도 나왔고요. 나선형 계단이 마음에 들었고, 교통도 좋았죠. 월세도 적정 수준이었어요.
이곳에서 열한 분이 돌아가며 전시를 열죠. 전시가 끝난 뒤 서로 회고하는 시간을 갖나요?
이성휘 거의 항상요. 큐레이터뿐 아니라 작가와 전시에 관여한 분들이 모두 함께 했어요. 대외적으로 꺼내지 않지만 우리끼리는 나눌 수 있는 좀 더 내밀한 얘기들도 할 수 있죠.
김성우 전시에서 파생된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큐레이터 각각이 최근 느끼는 특정한 상황과 문제의식들… 그런 이야기가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죠. 최근 베니스 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 얘기가 나온 적 있고요.
서로의 전시를 보며 배우는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이성휘 웨스의 공간은 가로 7m, 세로 8m의 정사각형에 가까워요. 사실 전시를 열기에 쉬운 구조가 아니고, 무균실에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해요. 웨스의 다른 구성원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쓰는지 보며 많이 배워요. 웨스가 시작한 지 4년이 다 되었지만 각자 전시를 연 횟수는 한 두번 정도예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전시를 통해 많이 학습하죠.
이규식 다가오는 전시를 준비할 때 다른 멤버들을 관객으로서 많이 의식해요. 전시의 내용이 변한다기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다들 바빠도 전시를 보러 올 텐데…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죠.
전시를 기획할 때 다른 멤버들을 의식해 전시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있나요?
김성우 제가 웨스에서 첫 전시를 기획했어요. 그때 기획을 바꿨어요.
장혜정 저희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요. 그런데 첫 순서로 뽑혔어요. 첫 순서라는 게 사실 얼마나 큰 무게를 느꼈을까 싶어요.
김성우 그때는 아직 웨스에서 무엇도 일어나기 전이었어요. 그런데 여기는 전시장이고 큐레이터들이 몰려있다고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전시장만 봤을 때는 정말 중립적인 화이트 큐브인데, 관심이 과도하게 몰린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원래 계획했던 작가의 전시 대신,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그게 아니야’라는 주제의 전시를 만들어봤죠. 조금 비꼬는 뉘앙스를 섞어서요. 〈아나모르포즈〉라는 전시가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릴수록 흐려지고,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이라는 부제를 달았어요. 관람객들이 관성적으로 뭔가를 기대하는 상황이 싫었고, 그로부터 우리는 얼마든지 벗어나거나 흩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여기에서 일어날 전시들이 좀 더 자유롭기를 원했지요. “출입문을 닫고 감상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일부러 문에 쓰는 등 장치도 많이 고민했어요.
첫 전시로부터 4년이 흘렀는데 웨스는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어요. 웨스의 동료애는 어느 지점에서 뚜렷해지고 흩어지나요?
송고은 주변에서 ‘큐레이터들 11명이 모여 싸우지는 않냐’고들 묻곤 해요. 정말 좀 싸울 때가 됐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잘 지내요. 웨스의 동료애는 서로 끈끈하고 속속들이 잘 안다는 의미보다, 바라보는 방향이 같고 서로의 일을 꾸준히 지지한다는 개념이에요. 이런 관계가 끈끈한 연대의식보다 더 좋다고 생각해요.
장혜정 큐레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의식은 작가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웨스를 같이 운영하시는 모든 분들은 진정성 있게 작가를 대합니다. 그런 면에서 열한 명 개개인을 동료로서 더욱 존중하게 돼요. 전시만 본다면 이런 측면은 희미하거나 아예 모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전시를 꾸리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지 그 과정을 전부 공유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어요.
이성휘 전시에 대한 신념은 아무나와 쉽게 공유할 수 없어요. 이미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사람, 내 말을 왜곡하지 않고 들어줄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죠. 그러면서 비판적으로 들어주고, 그렇다고 또 불쾌해하지는 않을 사람. 웨스는 수평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했어요. 혜정과 고은이 먼저 시작했지만, 두 사람도 리더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지금부터 우리가 각자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여기에서 맺은 관계와 경험의 영향이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