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이미지가 아니네요.”
첫 만남 때 이런 말을 건네는 사람은 십중팔구 내 책 <난생처음 킥복싱>을 읽은 사람이다. 2년 전 이맘때 출간한 이 책은 아무래도 나에게 ‘근육질의 체격 좋은 여성’이란 이미지를 선사한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에 근육이 양껏 자리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운동 에세이를
막 출간한 2년 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역병이 세상을 강타한 후 근육 운동과 한참 거리 두기를 했던 지금의 내 몸은 말해 무엇할까.
“겨우 1년 운동한다고 근육질 몸이 되는 건 아니에요.”
운동 에세이까지 쓴 사람이 이런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어쩐지 독자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아 매번 조금 민망한 듯 대꾸를 하면, 상대방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음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어떻게 킥복싱을 할 생각을 하셨어요?
이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어느 날 킥복싱이 머리에 떠올랐고, 떠오른 김에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봤으며, 마침 집 근처에 킥복싱을 가르치는 체육관이 있어서 신용 카드를 들고 찾아간 것뿐이니. 그렇다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다. 남들이 흔하게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생경한 일에 관심을 갖고 직접 해보는 것,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궁금한 거겠지.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니다. 내가 3년 전 킥복싱 체육관을 찾아갔듯, 그냥 편한 옷을 위아래로 입고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뿐. 처음 들어가기가 힘들지 한번 들어가면 그곳도 곧 익숙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이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되는 영화 <위핏>의 주인공 블리스가 그랬다. 열고 싶은 문을 발견한 그녀는 주저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당장 찾아가 그 문을 연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아름답고 우아한 요조숙녀가 되길 강요받던 블리스는 어느 날 우연히 한 무리의 여자들을 마주친다. 가게 안으로 시원하게 달려 들어와 광고지를 내려놓고 나가는 여자들. 짙은 화장에 거친 타투에 빨갛고 노랗고 초록초록한 머리 색깔에, 무엇보다 여자들이 타고 있는 롤러스케이트를 본 블리스의 눈에 호기심이 차오른다. 엄마의 고리타분한 여성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딸이었지만, 실은 내면에 주체성이 꽉 차 있던 블리스. 호기심이 생긴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부모에게 산뜻하게 거짓말을 한 그녀는 친구와 함께 ‘롤러 더비’를 보러 간다. 열광적인 관중과 시끄러운 사회자 그리고 온몸에 공격성과 활력이 가득한 여자들. 두 팀이 몸과 몸을 부딪치며 과격하게 진행되는 경기에 블리스는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그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엄마가 골라준 드레스를 입고 미인 대회에 참여해야 했던 블리스는 이젠 짧은 선수복을 입고 같이 뛰는 여자들과 부딪치고 넘어지고 구르고 다친다. 롤러스케이트가 선물하는 아찔한 스피드에 몸을 싣고 상대 팀보다 1포인트라도 더 따기 위해 피하고 넘고 달린다. 이후의 내용은 블리스가 팀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면서 사랑과 이별을 겪고 마지막에는 부모와의 갈등까지 매듭을 짓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감정 소모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던 이 영화 속 블리스가 나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도, 첫사랑을 하고 첫 이별을 단행할 때에도 너무 복잡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앞으로의 내 시작과 끝도 이처럼 깔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 <위핏>엔 나름 라이벌 인물도 등장한다. 세 보이는 눈 화장만으로 영화에서 맡은 역할을 짐작케 하던 그녀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내 짐작에서 기분 좋게 비켜났다.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의 악당인 줄만 알았던 그녀도 실은 블리스처럼 그저 롤러스케이트가 좋아 그 속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서사. 열일곱 살에 롤러스케이트에 빠진 블리스와 달리 그녀는 서른한 살에 롤러스케이트를 만나 지금은 서른여섯 살이라는 것, 그리고 엄청난 노력 끝에 몇 년째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것. 후반부에 덧입혀진 그녀에 대한 정보로 나는 그녀를 달리 보게 되었고, 그래서 마지막 경기에서 그녀의 팀이 블리스의 팀을 이겼을 땐 전혀 아쉽지 않았다. 롤러스케이트라는 생소한 세계에 첫발을 디딘 서른한 살의 그녀를 응원한 후이므로.
매일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순 없지만 가끔은 새로운 일에 마음을 열고 싶다. 작은 도전 앞에서 주저하는 대신 도전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낯선 장소로 나를 데려가고 싶다. 복잡해질 것 없다. 미리 겁먹을 필요도 없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펼치고, 그냥 한번 해보기. 블리스처럼 가볍게 저질러보는 거다.
Writer 황보름
글을 쓸 때면 글쓰기는 왜 이렇게 힘든지 매번 놀라면서도 글만 쓰고 살 수 있는 날을 꿈꾸는 사람. 쓴 책으로는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