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부터 홍정희는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어머니로 인해 잡지를 동화책 보듯 쉽게 접했다. 처음으로 보기 시작한 건 어린이 잡지 『위즈키즈』. 책 한 권에 담긴 수많은 정보, 그 정보들이 하나의 레이아웃 안에 자유롭게 배치된 모습은 어린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그는 곧이어 『위즈키즈』를 발간하는 잡지사에서 에디팅과 모델을 직접 체험해 보며 패션 에디터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주로 패션 잡지를 모았다. “가장 좋아했던 건 『마르파 저널 MARFA JOURNAL』과 『알라 칼타 ALLA CARTA』예요. 두 잡지 모두 일관되면서 강렬한 개성을 가졌어요. 『MARFA JOURNAL』은 기본적인 레이아웃의 틀을 깨는 편집이 주를 이루고, 지면에 담긴 사진 또한 과감하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타이포그래피로 재치 있게 구성한 잡지예요. 또 『ALLA CARTA』는 절제의 미를 알게 해준 잡지인데, 별다른 텍스트 없이 대체로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는데도 기승전결이 지루하지 않게 표현되어 있었어요.”
그는 패션 에디터를 꿈꾸며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디자인에 치중된 커리큘럼은 적성과 맞지 않았고 결국 자퇴를 택했다. 그러고는 패션업계에서 일해 보기도 했지만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때 느꼈다.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패션을 좋아해서이기보다 잡지와 그 안에 담긴 비주얼을 동경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난 뒤 비주얼 디자이너를 꿈꾸었고, 잡지만 모았던 취향도 아트 북이나 사진집으로 점차 넓혀갔다.
“시각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폭넓은 시각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 아트 북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패션 잡지보다는 아트 북의 구성이 좀 더 자유롭다고 느꼈거든요. 동일한 규격에 어떤 레이아웃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풍기는 느낌이 다르기도 하고요.”
홍정희는 잡지와 아트 북에서 받은 영감을 기록하기 위해 스크랩을 시작했다. 처음엔 스크랩한 페이지를 파일에 넣어두는 방식이었으나 뒤죽박죽 섞여 있다 보니 필요할 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다 찾은 방식이 ‘스크랩북’이었다. 스크랩한 종이들을 분위기별로 분류해서 각각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 순서는 이렇다. 우선 마음에 드는 페이지들을 찢거나 오려서 파일에 보관해 둔 다음, 알맞은 뼈대(책)를 찾게 되면 파일에 보관해 뒀던 스크랩물과 프린트물을 전부 모아 분류한다. 그러고는 빈 페이지에 모아 붙이거나 기존 페이지에 콜라주 하듯 덧씌우는데, 모든 과정에는 촉감이 살아 있다.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에 끌려요. 물론 외부 작업에 의해 자료를 찾아야 할 때나 지류로 나오지 않는 이미지는 핀터레스트와 같은 웹에서 모으기도 하는데요. 스크랩북 작업을 할 때는 책이 가진 비주얼이나 재질 등 다양한 성질을 섞어서 재조합하기 때문에 촉감에 우선해 작업하죠.”
스크랩북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는 필요에 따라 원하는 주제만 골라 볼 수 있게 되니 작업 시간이 훨씬 빨라졌고 편리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스크랩해 놓은 것들을 펼쳐 놓고 재구성하는 시간은 제 취향을 파악하는 시간이에요. 스크랩북을 만들기 전에는 저 자신을 모르다 보니 가끔 작업하다 막히는 상황이 오기도 했거든요. 그때마다 스크랩북을 만들면서 많이 해소해 나갔어요.” 그는 날것과 인위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다양하게 조합하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 “저는 인위적이지 않고 오리지널리티가 강한 것들에 매력을 느껴요. 최근에 만든 두 권의 스크랩북이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아요. 하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현대 미술 작가 ‘에르빈 부름 Erwin Wurm’의 전시 책자와 독일 베를린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New Tendency’의 아카이빙 북 『Raw Essentials』을 재조합해서 만든 스크랩북 『Crumple』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 출신의 아티스트 ‘제레미 라폰 Jeremy Laffon’과 ‘엘비아 테오츠키Elvia Teotski’의 사진집 『BOTTLE JOE』 속 노이즈 섞인 이미지와 그동안 다른 데서 스크랩했던 독특한 디자인의 사물 이미지를 재단해 색감과 사물의 조합을 다양하게 구성해 본 스크랩북 『Noise』예요. 이런 식으로 스크랩북을 만들다 보면 자연스레 취향을 파악하게 되고, 페이지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어떤 것과 결합할지 가늠해 보면서 레이아웃을 구성하는 능력을 키우게 돼요.” 그는 스크랩북 덕에 어떤 작업 요청에도 막힘없이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들에서 그가 무의식적으로 습득했던 것들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스크랩 방식을 타인에게 공유한다. 최근에는 30여 명과 함께 스크랩북 강의를 진행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것이 큰 틀의 수업 과정이지만 그보다도 본인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수강생들에게 스크랩북의 퀄리티보다 만드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해요. 퀄리티를 올리는 건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본인을 파악하는 건 평소에 쉽게 할 수 없으니까요.” 처음엔 어색해해도 다들 무의식적인 손의 움직임을 따르며 마침내 결과물을 완성해 내고 뜻밖의 취향을 발견한다. 그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스크랩북을 함께 만들며 영감을 나누고 얻을 수 있던 경험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더욱 알리게 된 건 유명 아티스트의 앨범 커버를 만들면서였다. 딘, 로꼬, 크러쉬, 라비 등 아티스트의 앨범 아트워크를 하며 시각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을 드러낸 것. “앨범 디자인은 청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시각적으로 대변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흥미로워요. 노래를 들으면 이미지가 떠오르고, 이미지를 보면 노래가 생각나는 이 둘의 구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면 성취감이 엄청나요.” 앨범 디자인을 비롯해 작업을 할 땐 늘 ‘앤트프넌’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물론 자신의 색을 담을 수 없는 작업도 맞닥뜨리게 되지만 어떻게든 그 안에 자신이 지닌 색깔을 녹일 수 있는 영역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때 스크랩을 하며 손으로 익힌 감각이 도움이 된다. 마우스로 손이 옮겨 가더라도 생생함은 여전하다. “빈 종이에 스크랩 이미지를 채우면서 시뮬레이션을 해보잖아요. 이런 노하우가 쌓이면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 화면 속 빈 레이어를 채우는 것도 술술 풀리게 돼요. 설사 막히더라도 스크랩북을 펼치면 늘 해답을 발견할 수 있죠.”
그는 직접 찍은 사진을 활용해 ‘엔티에프유 컬렉터블스 NTFU COLLECTABLES’라는 굿즈 브랜드도 운영하고 있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모아 스테이셔너리 굿즈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필름이나 디지털 사진보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데다가 휴대폰 사진이 가진 특유의 색감과 화질이 맘에 들거든요. 그런데 막상 저장한 사진들을 꺼내어 볼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사진을 활용해 의미 있는 결과물로 표현해 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그래서 다이어리나 폰 케이스, 클립보드 등의 굿즈를 만들게 됐어요.” 셔터를 누르게 되는 순간들도 스크랩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새롭고 신선한 것이나 익숙하지만 끌림이 있는 것들 또는 재치 있는 것들을 스크랩하는 것처럼 셔터를 누르는 순간도 이와 비슷해요. 재미있는 상황이나 순간들을 기록하고 담아두죠.”
그는 머지않아 앨범 아트를 작업하며 느낀 것을 토대로 전시를 열 예정이다. 그리고 계속 앤트프넌만의 색이 담긴 비주얼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이유가 있는 비주얼을 만들고 싶어요. 한동안 ‘좋은 작품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개인의 취향과 시선이 있으니 제가 좋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좋지 않을 수 있어요. 비주얼적으로 화려하고 예쁜 작업보다는 왜 이렇게 만든 것인가에 대한 이유가 타당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똑같은 책을 두고 사람마다 스크랩하는 페이지가 다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왜 이 페이지를 골랐는지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예뻐서라기보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기 때문이라고, 내 마음의 방향을 정확히 아는 것. 홍정희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오며 수많은 페이지를 소화해 냈고, 마침내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정립했다. 그리고 시각 디자이너로서 여기에 자신의 이유를 덧댄 새로운 작업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그가 만들어내는 비주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홍정희만의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