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친척들을 방문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종로와 을지로 일대의 풍경을 좋아했다. 유리로 외벽을 두르는 커튼월 시공이 서울 번화가에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페인트나 타일로 마감한 건물들은 한 채 한 채 색이 모두 달랐다. 세로로 길쭉하거나 원형으로 점점이 박힌 창문들도 각각의 건물마다 독특한 패턴을 만들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신기하기도 해라.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이 넘은 빌딩이 어떻게 저렇게 세련되었을까? 서울의 모던에 매혹된 그는 결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며 도시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건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스마트폰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이 등장한 이후였고요.” 김영준은 10년째 도시의 빌딩을 디깅하고 있다. 192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지어진 옛 건물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발견하고, 그 발견의 풍경에 ‘서울의 현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SNS 계정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에 쌓인 기록들은 2권의 독립출판물에 이어 〈서울〉이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곧 발행될 예정이다. “건물을 관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만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었지요. 기록을 하다 보니 내가 그 건물의 영정사진을 남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명 건축가가 지었거나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건물은 다양한 자료로 남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건물 대다수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10년 동안 그가 기록한 건물들 중에는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예정인 것들이 많다. 김영준이 디깅한 건물의 기록은 결국 도시의 역사에 대한 아카이브가 된다. “화재에 취약하거나 휠체어 접근성이 낮은 등 옛 건물들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무작정 없애는 게 답은 아닐 거에요.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울의 역사가 단절되니까요.”
김영준은 오래된 건물의 가치를 재평가해 리모델링을 하거나 사라지기 전 투어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기록으로라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멸종 위기 동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땐 이미 개체수가 몇 남지 않았을 때잖아요. 위기에 처하기 전부터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지요. 건축물도 마찬가지죠. 근현대 건축을 찾아보고 소셜미디어에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건물의 생명력도 길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건축을 디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관심을 통해 건물의 보다 긴 이용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운동화 끈을 매고 도시 건축 디깅에 나서기 전,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 옛 건물에게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은 어떻게 기록해볼까?
[RESEARCH] 어떤 건물을 디깅할까?
1. 첫눈에 반하기
이동 중 우연히 끌리는 건물을 발견하면 기억해 두었다가 시간을 내서 동네를 찾아간다. 우연한 끌림을 위해선 오래된 건축물의 특징을 미리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2. 안목을 키우기
근현대 건축 디자인을 명확하게 구분할 자료가 없기에 사진을 많이 찾으며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구글에서 각 시대별 건축물 사진을 검색하거나 근현대 건물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SNS를 보는 것이 도움을 주었다. 김영준은 트위터에서 활동 중인 ‘이유’ 님의 계정(@gosooboogee)을 추천했다
3. 동네 알아보기
방문 전 동네에 대한 조사를 한다. 어느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형성된 지역인지 확인하면 그 동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2023년 3월에 한번 가봐야 하는 동네는? “을지로 세운상가 양옆으로 재개발이 시작되어 올해 그곳의 풍경이 많이 바뀔 거예요.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지어졌지만 골목은 조선 시대에 형성된 곳이에요. 이제는 사라질 서울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담아보기를 권해요.”
4. 주요 건물 정하기
백화점에 들어서면 사람들을 주목시키는 ‘앵커 테넌트’ 공간이 있듯이, 동네에도 앵커 테넌트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다. 보통 이 건물 주변으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빌딩이 자리해 있다.
5. 종이 지도 준비하기
인터넷 지도에서 그 지역의 큰길이 잘 보일 정도로 확대해 프린트하면 된다. 스마트폰으로도 지도를 볼 수 있지만 화면 크기에 한계가 있어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또 탐방하며 그때그때 종이 지도 위에 기록을 하다 보면 물리적인 공간감이 느껴져 건물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DISCOVER] 건물을 관찰하는 방법
1. 건물 외관 사진으로 남기기
해당 건물을 중심에 두고 광각 앵글로 주변 풍경도 함께 촬영한다. 단, 건물이 좁은 골목에 자리했을 경우에는 넓게 찍는 게 불가능하므로 부분부분을 담아낸다. 건물 외벽의 소재, 창문 모양을 중점적으로 찍는데 운이 좋으면 오래된 간판을 함께 남길 수도 있다.
2. 건물 내부 관찰하기
보통 오래된 건물은 1층 로비까지는 들어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로비를 꾸민 부조, 계단참이나 난간 등을 사진으로 남긴다. 대형 타일을 사용해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하는 요즘의 빌딩과 달리 오래된 건물은 작은 타일을 활용해 바닥에 멋을 부린 경우가 많아 이를 보는 재미도 있다.
[RECORD] 건물 정보를 기록하는 법
1. 기본 정보 기록하기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키나 덩치 같은 외적인 모습과 나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어떤 건물을 안다고 말하기 위해선 준공 연도, 면적, 층수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건물의 준공 연도는 건물 외벽의 머릿돌에 쓰여 있으며, 면적과 층수, 건축 자재 등의 정보는 민원24 사이트의 건축물대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주소만 알면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
2. 건물의 역사를 알아보기
과거에는 건물 착공이나 준공, 빌딩의 새로운 입주사 소식이 신문에 실리곤 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1920년부터 1999년까지 발행된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검색해 볼 수 있다. 옛날 신문을 통해 정치인들의 회담 장소로 활용되었거나 중요 사건이 일어났던 건물 등,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Interviewee 김영준
유년시절부터 서울에 남아있는 1920~1980년대 빌딩에 매력을 느껴, 이를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journey.to.modern.seoul)’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도쿄의 오래된 건물을 디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