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어쩌죠? 우리 회사도 다음 달부터 재택근무가 완전히 종료된대요.
팬데믹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한번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이전의 체제로 단번에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야. 미국의 한 설문 조사1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100% 사무실 근무로 강제 복귀하느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어. 한국은행이 낸 보고서2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도 기업에서 재택근무 또는 하이브리드 근무 형태를 도입하는 추세가 늘어날 것이라고도 했고.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절반 이상의 조직이 필연적으로 재택근무를 경험하게 되면서 재택근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관련 투자도 늘어났기 때문이래.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선배가 정말 부러워요. 원격 근무하면서 워라밸도 챙기고.
과연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 재택이나 원격 근무를 실시할 때 가장 많이 관찰되거나 보고되는 부작용은 과로와 번아웃이야. 사무실로 출퇴근할 때는 사무실을 떠나면 업무가 함께 끝나는 느낌이잖아. 하지만 재택과 원격 근무는 업무 환경이나 일의 시작과 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니 결국 워라밸이 망가지는 결과가 생기는 거야.
원격 근무와 번아웃이라니 잘 연결이 안 되는데요?
원격 근무 시행사의 경영진이 원격 근무의 폐해, 단점으로 자주 꼽는 것이 과로야. 일을 적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이 해서 문제라는 거지. 출퇴근이나 불필요하고 잦은 회의 등 집중에 방해되는 요소들이 사라지다 보니 집중이 잘되는 상황에서 일을 더 하게 되기도 하고, 동시에 원격 근무라는 ‘혜택’을 잃지 않기 위해, 또는 원격 근무에 익숙하지 않은 관리자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해. 나 역시 일과 휴식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은 문제와 그로 인한 번아웃을 겪으면서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고.
원격근무를 선택한 직원들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일까요?
조직, 특히 관리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런 상황에서 조직이 직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하고 지침을 만들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거지. 명확한 원격 근무 지침 가이드라인과 커뮤니케이션 방침을 정하고, 정기적인 개인 면담을 포함한 관리자들의 세심한 케어와 합리적인 업무 평가는 필수야. 실제로 많은 원격 근무 시행사들의 경영진이 일과 생활의 경계 보장, 투명한 업무 분배와 우선순위 지정, 직원의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 강화 등을 자사 정책에 포함시키고 있어.
선배, 홈오피스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디지털 노마드에게 사무실이 필요할까요?
원격 근무 이야기를 할 때 사무실이 마치 불필요한 과거의 유물처럼 취급 받는데, 한번 생각해 보자고. 사무실이라는 고정된 하나의 사무 공간이 제공하는 요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해온 게 아니겠어?
디지털 노마드는 고정된 사무실에서 제공해 왔던 요소들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네요.
그렇지. 원격 근무로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사무실이 지금껏 제공해 왔던 수많은 요소를 밖에서 스스로 찾고 최적화하는 노력이 필요한 거야. 내 경우에는 두어 달 이상 해외에서 지낼 땐 클리닝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아파트 형태의 레지던스나 에어비앤비를 주로 이용해. 여기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는 바로 인터넷 속도와 제대로 된 책상이야. 때로는 내게 필요한 사무 가구나 스탠딩 데스크를 렌털해서 사용하고, 중요한 영상 편집 때문에 큰 스크린이 필요할 때는 협업 공간에서 모니터를 대여하기도 했어. 또 언제 어디서든 랩톱을 이용할 때는 반드시 랩톱 스탠드를 이용해 스크린 높이를 이상적인 상태로 맞추는 습관을 들였고. 손목 터널 증후군을 한번 겪어보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거든.
경험이 쌓이면서 선배만의 루틴이 생긴 거네요.
내가 본 원격 근무자들의 실제 삶은 사람들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어. 흔히 디지털 노마드를 ‘해변에 앉아 칵테일을 옆에 두고 노트북을 펼쳐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무조건 ‘여행’ 이야기가 세트로 따라 나오는 것도 상당히 이상해 보였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노마드의 진정한 실상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지.
따지고 보면 원격근무자들도 남들과 다름없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네요.
맞아. 다만 내가 일하고 살아갈 장소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인 거지. 때로는 더 엄격한 자기 관리와 책임감이 필요하기도 해. 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대신 어떤 날은 아홉 시간이나 시차가 있는 도시의 동료와 화상 회의를 하기 위해 새벽까지 깨어 있어야 할 수도 있고, 일을 하며 친구를 사귀어도 그가 디지털 노마드라면 얼마 되지 않아 작별 인사를 해야 해.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이 바로 외로움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머무를 공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것’, 이 하나의 차이가 삶에 주는 만족감은 상당히 커.
선배의 경험이 쌓이면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거네요. 세계 최초로 디지털 노마드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원웨이 티켓〉이죠.
그때 여가 시간을 활용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찍고 편집해 온라인에 공개하기 시작했어. 전 직원이 원격 근무 정책을 시행하는 오토매틱의 CEO 맷 뮬렌웨그, 베이스캠프의 창업자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핸슨 등 연간 25개 도시에서 68명의 사람을 인터뷰했지. 이 짧은 영상들이 확대되어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발전된 거고. 최종 필름에 등장한 인터뷰이는 약 40명이야. 한정된 몇몇 인물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현상이자 새로운 일과 삶의 방식으로서 다각도로 이 주제를 다루고 싶다는 욕심이 컸던 것 같아. 이 제작 과정이 내게 더욱 의미가 깊은 건 다큐멘터리의 제작마저도 촬영부터 편집까지 많은 부분이 원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야. 촬영본의 약 70%는 내가 직접 촬영하고 인터뷰했지만 나머지 촬영과 섭외, 편집과 각종 후반 작업은 전 세계 각지에 있는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원격으로 받았거든. 영국, 한국, 독일, 미국, 브라질, 라트비아, 태국 등지의 제작진과 함께 일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어도 내게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어. 끈끈한 팀워크는 말할 것도 없고.
노마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마음껏 누리는 젊은이들이에요.
디지털 노마드의 절반 정도는 20~30대 미혼인 젊은 층이고, 나머지 절반은 자녀를 둔 부모들이야. 프리랜스 플랫폼 회사인 톱탤의 공동 창업자이자 COO인 브랜든 베네슈트와의 인터뷰에서 브랜든은 원격 근무가 얼마나 가족 친화적인 제도인지 이야기했어. 사람들이 흔히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디지털 노마드의 핵심은 개개인의 상황과 선호에 따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디지털 노마드가 각광받는 진짜 이유지.
가족을 위해 원격 근무를 선택한 거군요. 그들은 주로 IT 직종인가요? 아니면 프리랜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원격 근무는 개발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같은 질문을 받았어. 실제로는 우리가 보통 ‘전통 산업’이라고 생각하는 분야의 기업들 중에서도 원격 근무를 적극 도입하고 시행하는 기업들이 많아. 대표적으로 미국 최대 회계 기업인 딜로이드를 비롯한 상당수의 보험, 금융 회사들이 있지. 그리고 디지털 노마드가 프리랜서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오해하는데, 사실과 달라. 국내에 원격 근무 시행사가 드물기 때문이지.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원격 근무 시행사를 찾기 쉬울 거야. 다만 영어는 구직과 지구 각지의 팀원들과 소통해야 하니 필수야. 완벽한 문법보다는 소통 능력이 중요하니 지레 겁먹지 말고 우선 도전해 봐.
선배 생각에는 앞으로 우리의 일하기 방식은 어떻게 변화할 것 같아요?
앞으로 지인들 중에 원격으로 일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는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처음에는 그저 부럽다고 하거나, 그게 무슨 꿈같은 소리냐고 하겠지. 그러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잠깐, 저 사람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하지?” 그 후에 곧바로 원격 근무를 시작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직을 고려할 때 원격 근무 시행 여부가 회사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거야. 삶에서 출퇴근이 사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더라. “상상 그 이상으로 내 삶이 다채로워졌다”고.
선배 덕분에 원격 근무의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아요. 그런데 선배, 지금은 어느 도시에 있어요?
하하, 왜 내가 해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디지털 노마드는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서울에서 다음 다큐멘터리 개발 작업에 매진하며, 영상 제작 강의도 병행하고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이곳저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매일 소통하지.
요즘은 어떤 촬영을 하고 계세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디지털 노마드를 주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뤘다고 생각해. 그 이후로는 코로나19 시대의 2030 여성과 주거 이야기, 그 지역의 이야기를 전하는 로컬 아카이빙 등 다양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왔고. 가장 최근에 발표한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불법 촬영 범죄, 이에 맞서 싸우는 범죄 피해자 그리고 함께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였어. 알려지고 간직되어야 할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영상으로 담아내는 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작업들을 해나갈 생각이야.
Interviewee 도유진
다큐멘터리 감독, 작가, 강사. 세 가지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한다. 늘 무언가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일을 하고, 때때로 글을 쓰고 강의도 한다. 대표작으로는 원격 근무를 통해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이들과 원격 근무 시행사의 이야기를 담아낸 장편 다큐멘터리 〈원웨이 티켓〉,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주간지 〈타임〉을 통해 공개한 한국의 불법 촬영 범죄를 다룬 단편 다큐멘터리 〈오픈 셔터스〉가 있다.
[각주 1] 글로벌 리쿠르팅 기업 ‘로버트 하프’가 발표한 자료에서도 미국 노동자의 절반가량은 100% 사무실 근무로 강제 복귀하느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재택근무 계속’… 사무실 복귀에 사표 내는 노동자들〉, BBC NEWS 코리아, 2022. 5. 29. bbc.com
[각주 2]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택근무 확산(쟁점과 평가), 한국은행, 2020. 12. 13. bok.or.kr
자료: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 디지털 노마드〉, 도유진 지음, 남해의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