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로수길에 위치한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공간은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은 작업실, 다른 한쪽은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토요일에만 문을 여는 ‘프로파간다 시네마 스토어’다. 후자는 한 마디로 최지웅이 30년 넘게 모아온 방대한 영화 홍보물 컬렉션을 소개하는 갤러리인데, 그동안 〈빽 투더 퓨쳐〉, 왕자웨이(왕가위), 장궈룽(장국영), 홍상수, 김희애 등 특정 영화나 영화인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어왔다. 특히 재작년 여름에 진행한 호러 특집은 시네필 사이에 두고두고 화제였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빨간 불만 켜놓고 새벽 2시까지 운영했어요.” 그는 이날을 위해 〈샤이닝〉, 〈엑소시스트〉 등 고전 공포 영화의 오리지널 포스터부터 〈양들의 침묵〉 한정판 면 마스크 굿즈와 〈미드 소마〉 공식 팝업 초대장 같은 희귀템, 패션 브랜드 커버낫과 협업해 제작한 처키 티셔츠까지 선보였다. 현재 그는 故 강수연 배우를 추모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최지웅이 직수입한 해외 영화 포스터, 잡지, 단행본, 블루레이, LP 등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셀렉트 숍이기도 하다. 아예 라이선스를 구매해 판매 중인 〈아가씨〉 해외판 포스터와 1993년 개봉 때 그가 직접 떼어 온 〈서편제〉 포스터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고, 캐나다의 신생 영화 전문지 〈레이어드 버터〉와 폐간된 1990년대 영화 잡지 〈스크린〉이 한 책장에 꽂혀 있으며, 〈드라이브 마이 카〉 한정판 OST LP와 〈접속〉 OST CD가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한다. 워낙 진귀한 ‘레어템’이 많다 보니 프로파간다 시네마 스토어는 ‘영화 덕후의 성지’로 불린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기 전에는 오픈 5시간 전부터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섰고, 지금은 예약 사이트를 오픈한 지 몇 분 만에 120명분이 금세 동난다. SNS에는 성지 순례를 방불케 하는 방문 리뷰가 쇄도한다. “리뷰를 다 찾아서 읽어보는 편인데, 그중에서 ‘드디어 구했다!’는 말이 가장 와닿더라고요. 딱 수집을 할 때의 제 마음 같아서요.”
열 살 때부터 착실한 수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손꼽히는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로 성장하기까지, 최지웅의 인생은 마치 한 편의 성장 영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빛나는 플래시백 장면이 여럿 있다. 〈영웅본색〉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 카드를 손에 넣기 위해 거금 1천 원을 주고 친구와 딜했던 장면, 극장에 붙은 개봉 영화 포스터를 몰래 떼어 오려고 숱하게 새벽이슬을 맞았던 장면, 그러다 뒷덜미를 잡혀 끌려간 영사 기사님의 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한 아름 선물 받았던 장면, 무작정 먼 도시에 있는 극장에 전화해 장국영 주연 영화 전단지를 보내달라고 간청한 끝에 우편으로 받았던 장면 등이 그렇다. 그간 수집의 범위는 주로 영화였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 관련 아이템을 모아 자신만의 ‘호돌이 컬렉션’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때의 일이 정확히 30년 후에 아카이브 북 〈88Seoul〉의 발간으로, 문화역서울284의 초대 전시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라는 인생의 결정적 한 장면으로 이어질 줄은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88Seoul〉은 서울올림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빛나는 과거의 생생한 환기를, 젊은이들에게는 존재감이 희미했던 호돌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계기라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최지웅의 수집은 본업인 영화 그래픽 디자인 과정에서 창작의 단서이자 재료로 쓰인다. 옛날 영화 포스터의 사진과 레터링, 레이아웃은 살아 있는 참고 자료가 되고, 종이의 낡고 바래고 해진 흔적은 디자인 합성 소스로 활용되는 식이다. 그는 여느 디자이너처럼 핀터레스트나 비핸스를 기웃거리는 대신, 스스로 축적한 아카이브를 도서관처럼 이용한다. “지금도 디자인이 막힐 땐 과거 영화 포스터들을 한 장씩 넘겨 봐요. 그럼 대부분 갈피가 잡히죠. 요즘은 〈기쁜 우리 젊은 날〉, 〈업〉 등 1980년대 영화 포스터 속 구본창 작가의 사진을 주의 깊게 보고 있어요. 확실히 감도가 남달라요.”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된 옛 글자의 잉크 번짐까지 그대로 활용한 〈고령가살인사건〉의 타이틀, 개봉 당시 포스터의 사진 일부를 확대하고 장기인 캘리그래피를 더해 완성한 〈패왕별희〉 재개봉 포스터 등은 아카이브를 활용한 명확한 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포스터를 하나의 ‘작품’으로 고이 간직했던 경험은 지금도 모니터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든다. “제가 그랬듯 누군가가 영화 홍보물을 수집하고 소중하게 보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게 돼요.” 포스터가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광고의 역할은 물론이고 그 자체로 작품성을 가졌으면 하는 것은 여전히 그를 붙잡는 고민이다.
최지웅은 2013년에 독립 출판 브랜드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를 론칭했다. 초기에는 〈PP(Propaganda Posters)〉, 〈필름 타이포그래피〉 등 프로파간다의 작업물을 정리한 책을 출간했고, 〈딱지 도감〉(2015) 이후로는 국내 출판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카이브 북’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나갔다. 영화 홍보물뿐 아니라 종이 딱지, 잡지 창간호 등 그가 모아온 20세기 시각 문화유산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 시작이었다.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의 모든 책은 기획부터 자료 조사, 섭외, 디자인, 유통까지 최지웅이 도맡고 있다. “친구들도 많이 물어봐요. 너는 본업 하기도 바쁠 텐데 어떻게 짬을 내서 책까지 만드느냐고. 하루에 2페이지씩 작업하면 됩니다(웃음). 처음부터 거창한 출간 의도는 없었고요. 솔직히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동네 문방구에서 유통되던 ‘불법’ 종이 딱지들 속에서 무명 디자이너의 기지 넘치는 레터링과 컬러링을 찾아내는 재미(〈딱지 도감〉), 영화 굿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1970~80년대 영화 카드 1,200여 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영화 카드 대전집〉 시리즈), 1950~1960년대 국내 개봉 외국 영화의 광고 선전물 400여 점을 반세기 후에 목격하는 재미(〈영화 선전 도감〉), 30년 전 컴퓨터 프로그램 없이 디자이너가 손수 도안한 캐릭터의 세련미를 재발견하는 재미(〈88Seoul〉). 최지웅은 지금껏 책이라는 통로를 빌려 그가 느껴온 재미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서 같이 즐겨보자고 말을 건네온 셈이다.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에서 출간 예정인 〈영화 선전 도감〉 두 번째 책의 주제는 ‘극장 간판 그림’이다. ‘간판쟁이’라고 불리던 옛 화가들이 그렸던 극장 간판 그림들이 사진으로 다수 수록될 예정이다. 그는 관련 사진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과거 주한 미군으로 일했던 어느 미국인이 당시 간판 그림을 슬라이드 필름으로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곧바로 연락해 섭외에 성공했다. 다만 단순히 사진으로만 기록된 탓에 정확한 정보(극장 이름, 영화 제목, 개봉 연도 등)를 파악할 수 없어서 전문가와 함께 문헌을 뒤져가며 추리하듯 해당 정보를 찾아내고 있다.
요즘 그에게 새롭게 꽂힌 수집 대상은 ‘짝퉁 ET’다. 라이선스 개념이 전무했던 1980년대에 쏟아졌던 각종 이미테이션 영화 굿즈(자석 필통, 스티커, 종이 인형, 마스크 등)를 이미 몇 박스나 모아놨다. “나중에 이 짝퉁 ET를 모아서 아카이브 북을 내고 싶어요. 근데 유니버셜에서 허락해 줄까요?” 최지웅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안다. 결국 그가 영화사에 장문의 출판 허락 요청 이메일을 보내고 말 것임을. 그리고 최지웅의 진심은 또 한 번 멋지게 통하게 될 것이란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