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와 원숭이, 데이비드 호크니와 물, 구사마 야오이와 동그라미. 이와 같이 작가에게는 각자 깊게 파고드는 소재가 있다. 진청에게 그 대상은 돌고래다. 그가 돌고래를 그리게 된 이야기는 열두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 여행으로 간 미국 바하마 섬에서 어린 진청은 5분짜리 ‘돌고래와 수영하기’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그때 돌고래 피부에 닿던 손의 감각이 아직도 정말 생생해요. 마치 공기로 꽉 찬 풍선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진청은 그날 완전히 돌고래에게 반해 버렸고, 돌고래 모양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 모으기 시작했다. “돌고래를 향한 제 사랑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가족, 친구들도 돌고래와 관련된 물건만 보면 까마귀처럼 가져다줘요.” 그렇게 그의 책상에는 돌고래가 주인공인 소설과 영화 DVD, 돌고래 스티커, 돌고래 반지와 귀고리, 돌고래 키링 등이 17년간 쌓여갔다.
돌고래를 가두는 수족관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대신 돌고래가 나오는 영상을 찾아본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다큐멘터리는 제주 해녀와 돌고래의 각별한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영상 속에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돌고래는 그곳으로 찾아왔고, 둘은 춤추듯 함께 수영을 하곤 했다. 진청은 그때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죽기 전에 서로를 알아보는 친구 같은 돌고래를 만나고 싶다는 꿈같은 소원이다. 도시를 떠나 바닷가 마을에 살게 된다면, 수영을 제대로 배우거나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게 된다면 야생 돌고래들과 함께 바닷속을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살면서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무감각을 두려워한다면, 누구든 예술가일 것이다. 돌고래는 진청의 무감각을 일깨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돌고래를 사랑하면서부터 살아 있는 존재에게 자유롭게 산다는 감각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제 손을 돌고래의 지느러미에 얹은 순간, 양손으로 지느러미를 잡고 바다로 헤엄쳐 나가는 상상을 했어요. 변덕스러운 파도, 상어나 바라쿠다를 만나더라도 돌고래와 함께라면 다 괜찮을 것 같았죠. 그 순간 정말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인생을 통틀어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결정적인 순간이자 아주 중요한 내면의 기억으로 남았죠.”
진청이 돌고래 모형과 함께 수집하고 있는 것은 빈 조개껍데기다. 여행지도 바다가 있는 곳을 선호하는 편이라, 갈 때마다 그곳의 조개껍데기를 주워 온다. 꾸준히 모으다 보면 몰랐던 맥락이 어느새 읽히게 마련이다. 진청은 그렇게 자신이 비어 있는 것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명이 없는 모형과 생명이 떠난 껍데기에 이야기의 숨을 불어넣어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일은 진청이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과 흡사하다. 수집이 쌓이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창작의 밑그림이 된다.
그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사람, 그 곁을 따라 헤엄치는 돌고래, 일렁이는 파도, 물결 따라 흔들리는 해초와 조개를 그려 넣는다. 그들은 그림 속에서 모두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부유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바다가 평온한 것만은 아니다. “바다의 모습은 경이로울 만큼 다양한 것 같아요. 생명을 낳는 풍요롭고 다정한 곳이지만, 생명을 앗아가는 차갑고 무서운 곳이기도 하죠. 햇빛이 비치는 얕은 바다는 투명한 초록색이지만 캄캄한 날의 깊은 바다는 불투명한 진회색이 되기도 하고요.” 다정하게 품어주다가도 매섭게 몰아치는 찬 바다의 면모를 담아내기 위해 진청은 조색하는 시간에 공을 들인다.
“물감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법을 좋아해요. 시간차를 두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죠. 짙은 파란색 위에 파란색을 올릴 수도 있고, 노란색 위에 파란색을 올려 대비를 주기도 하고요.” 그는 물감이 마르는 시간만큼이라도 사람들이 그림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좋아해 줄 법한 그림을 그리기보단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자고 마음을 굳게 정했어요.”
최근에 열린 그의 첫 전시 <긴 꿈에 헤매더라도>는 작가로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이 전시 제목은 그가 언젠가 제목으로 지으려고 아껴둔 문장이다. “헤매더라도 시작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작가로서의 결심이죠. 첫 전시라서 그림뿐 아니라 그림의 재료가 된 드로잉과 메모들 그리고 종이 팔레트로 만든 설치물까지, 스스로의 작업 세계를 다채롭게 펼쳐놓으려고 애썼어요.”
진청은 긴 꿈에 헤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꾸준히 이어갈 것이다. 돌고래가 힘껏 헤엄쳐 깊은 바다로 나아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