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책상의 시간
‘책상의시간’은 책상 앞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의 ‘시작’과 ‘지속’을 조명합니다. 책상 앞에서 쌓인 시간의 이야기로 영감과 용기를 전할게요.
20대에서 30대로,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며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도전하는 일이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과 다른데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괜찮을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던 시절. 나이를 핑계 삼아 현실과 타협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꿈꾸기보다 익숙한 일상에 안주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용기 내어 원하는 일들을 하나씩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움츠러들게 하는 소모적인 에너지라는 것을. 이루고 싶은 꿈과 하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책상의 시간’ 첫 번째 인터뷰이로 ‘여유재순’ 작가님을 꼭 모시고 싶던 이유이다. 여유재순 작가님은 올해로 92세. 친구들은 모두 노인정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 작가님은 자신의 방 한 켠에 마련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직접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팬들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쌓인 그림은 벌써 1,600점 이상, 작가님을 좋아하는 팔로워는 7.7만 명. 무엇이 작가님을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만들었을까? 나이라는 숫자에 굴복하지 않고,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여유재순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
– 작가님의 따뜻하고 정다운 그림들을 평소에 참 좋아했어요. 어떻게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게 되셨나요?
제가 맨 처음 배우게 됐던 건 그림이 아니고, 인터넷이었어요.
– 아, 인터넷이요?
네, 나이 먹고 늙어서 살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 하는 거 이거 못 따라가겠구나, 너무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가지고 여행 다니고 그냥 펄펄 뛰고 놀러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용기를 내서 인터넷을 배웠습니다
–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 결심이 엄청난 용기이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처음에 인터넷 배우러 가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킬 줄도 모르고 끌 줄도 모르고. 그때 반에서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는데 선생이 가라고 하더라고. 직접 가라고는 못하고 복잡할 것 같은데 그거 안 배우면 안 되겠어요? 하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나 이거 꼭 배울래요” 그러고는 등에서는 땀이 훅훅 쏟아졌어요. 배우겠다고 했으니 해야겠는데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몸도 안 따라주고요. 그러니 등에서 땀이 훅훅 쏟아지지.
– 등에서 땀이 훅훅 쏟아졌다는 얘기만 들었는데도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가요.
그때 한 반에 스무 명 정도 수업을 들었는데 제일 젊은 사람들은 60대 정도 됐을 거예요. 맨 처음 수업 등록하는 날에는 일찍 가서 줄을 섰다가 등록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열흘만 지나면 다 빠져나가요. 너무 어려우니까. 내가 아는 친구 남편도 교감 선생님 했던 사람인데 일주일도 안 다니고 그냥 포기했다고 그러더라고.
– 와, 많은 분들이 포기하실 때 작가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배우신 거예요?
응, 자존심 때문에 나는. 한다고 으스대다가 못하면 자식들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창피하니까. 그래서 그냥 어떻게든 내가 이걸 배워야지, 해내야지, 이런 욕심을 가지고 하다 보니까 시간이 수년이 흘렀더라고.
– 그럼 아이패드에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되신 거예요?
인터넷을 배우다가 갑자기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관공소의 아카데미 운영을 못 하게 된 거예요. 갑자기 집에 들어앉아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까 할 일도 없고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나 가르치던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어르신 그림 그리면 잘 그리실 거예요. 그림 한 번 그려보세요. ‘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본 일이 없는데 어디에, 어떻게 그리냐 하고 물었더니 그때 아이패드 얘기를 하더라고요. 인터넷을 배웠어도 아이패드라는 게 있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선생님이 알려준 애플 매장에 혼자 가서 아이패드를 사 왔어요. 그런데 또 아이패드를 어떻게 키고 끄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선생님한테 또 전화를 했더니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라고 그러더라고. 그렇게 강의 영상을 하나씩 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 그럼 강의를 들으면서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신 거예요?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이걸 바로 흉내 낼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켜놓고서는 몇 마디 듣고는 끄고 메모하고, 또다시 켜서 몇 마디 듣고 메모하고 그렇게 시작했죠.
– 그래서 책상 위에 노트가 있는 거였군요. 프로그램의 기능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손수 필기하시면서 공부를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데 또 메모로만 끝나면 안 되잖아. 내가 직접 연습을 해봐야지. 날만 새면 아이패드를 붙잡고 메모한 걸 연습했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 조금씩 색상은 어떻게 쓰는 거고, 연필로 어떻게 바꾸는 건지 알겠더라고요. 처음에는 선생님이 알려주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 해봤었는데 보고, 또 봐도 금방 잊어버리고, 이제는 더 못해요. 그래서 지금은 연필로 그림 그리고 색칠하고 그리고, 색칠하고 제가 자주 쓰는 기능들로만 그림을 그리죠.
– 인터넷을 배우실 때도 그렇고, 아이패드 드로잉도 그렇고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하시면 어떻게든 해내고자 하는 집념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쉽지 않았죠. 내가 뭣 헐라고 이걸 하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참 힘들게 아이패드를 사고 자식들에게도 ‘그림을 그릴 거다’ 라고 말했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면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 자존심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걸 배워야지 하면서 한 개씩 터득을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 인스타그램에 그림은 어떻게 올리게 되신 거예요?
명절에 집에 손녀가 놀러 왔는데 요새 뭐 하냐고 그래서 그림 그린다고 했더니 보여달라고 하더라고요. 제 그림을 보고 ‘너무 예쁘네’ 그러더니 인터넷 배울 때 만들어둔 인스타그램에 바로 올려놓더라고. 그림만 올려놔도 사람들이 막 온다고. 그래서 그렇게 몇 개 올려두니까 정말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 찾아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손녀한테 그림을 어떻게 올리는지 배워가지고 지금은 혼자서 올리고 있어요.
(여유재순 작가님이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들 @yeoyujaesun)
– 작가님이 직접 올리시는 줄 몰랐어요.
사람들이 제가 올린 그림 보고 팔로우도 해주고 글도 남겨주면 저는 다 답변을 해주고 싶은데 한 번 답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쓰기가 어려워서 지금은 ‘고마워요’로 다 통일해서 답변을 달고 있어요.
– 인터넷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며 일상에서 달라진 점도 있으세요?
원래 옛날에는 문화 센터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 만나 점심 먹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경비도 많이 들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친구들한테 ‘나 인터넷 배우러 갈 거야. 너도 안 갈래?’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때 ‘너 바보짓도 퍽 한다’고 그랬어요. 그 친구들은 지금 카톡도 하나도 못해요. 카톡을 보내도 하나도 소식이 없어요. 써본 일도 없다고 지금도 그래요.
– 그럼 친구분들이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시는 걸 보면 많이 놀라시겠어요.
많이 놀라죠. 이번에도 만났는데 친구 하나가 나더러 ‘너는 재주도 좋다. 너는 참 머리가 좋아’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요. 돈 벌어서 좋겠다 부러워해서 점심도 한 끼 사줬어요. 그리고 친구들은 다 지팡이 짚고 허리도 구부러지고 나올 때 자식들이 다 데려다줘요. 근데 나만 전철 타고 나가.
나는 노인정을 여태 가본 적이 없어요. 노인정에 가서 앉아있느니 지금처럼 책상에 앉아 새로운 걸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요.
– 그림을 그릴 때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세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많이 보죠. 젊은 사람들은 여행을 가서 자연이나 풍경을 보고 많이 그림을 그리겠지만 제가 도구 들고 다니면서 그림 그리고 할 처지가 안되잖아요. 운전을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나는 그림 밖에 보고 그릴 수가 없죠. 인터넷 배울 때 구글에서 다운받아 usb와 핸드폰에 모아둔 그림들이 있어요. 그 그림들을 보면서 꽃이면 꽃, 사람이면 사람을 따라서 그려요. 모양도 좀 바꿔보고 색도 바꿔보고, 그런 식으로 그려요.
– 그럼 작가님이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좋아하는 그림도 있으세요?
제 눈에 만족스러운 그림은 하나도 없어요. 제 그림을 봐주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그림이 다 다르던데 저는 지금도 그려놓고 나면 만족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버리지 않고 그냥 올려요. 원체 기본이 없어서 그런지 고쳐봤자 별로 달라지지 않더라고요.
– 제가 봤을 때는 그림이 너무 예뻐서 그렇게 생각하실 줄 전혀 몰랐어요. 그럼 혹시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좀 성장했구나 하는 느낌은 드시나요?
그래도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구나 그런 뿌듯한 기분은 더러 느껴요. 처음에는 겁도 나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도 많이 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들보다는 이런 그림이 예쁘고 좋구나, 어떻게 더 예쁘게 그리지?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그림을 그리실 생각이세요? 혹시 좀 더 그려보고 싶은 그림이라거나 이뤄보고 싶은 꿈도 있으실까요?
지금 생각엔 노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게 좋으니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 몸이 내 말을 들어줄지 그거를 확실히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70, 80대만 같아도 내가 앞으로 10년은 더 하겠다고 생각을 해보겠는데 말이죠.
– 작가님의 좋은 에너지로 앞으로 더 오래 그림 그리실 것 같은데요!
제 손녀도 매번 그 얘기를 해요. (웃음)
요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일대일로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아이패드를 좀만 더 배우면 그림이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요. 요즘 젊은 친구들 기술적으로 참 잘 그리더라고요. 그림을 그릴 때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예쁘게 그렸으면 싶은데 아무리 그려도 그게 잘 안돼요. 아이패드를 배워서 지금보다 좀 더 섬세하게, 예쁘게 그리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작가님에게 책상의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원체 어렵고 힘든 시절에 학교를 다녔어요. 제가 어렸을 적엔 수시로 전쟁이 터지고, 산으로 도망 다니고 사람들이 총 가지고 내 목에다 대고서 별짓을 다 하는 그런 수모를 당하고 살았었죠. 그런 시절에 무얼 배울 수 있었겠어요. 성인이 된 이후에는 주부가 돼서 책상에 앉을 일도 없었고요.
그런 제가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아이패드로 그림도 그리면서 이렇게 인터뷰도 해보고 전시도 해보고요. 제게 책상의 시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준 배움의 시간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궁금한 것도 찾아보고 그림도 그리는 시간이 참 좋아요.
✱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의 두 눈은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잔 주름들 사이에 자리한 깊고 반짝이는 작가님의 두 눈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어찌나 반짝이던지, 캄캄한 밤하늘에 수놓아진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콕 박아둔 것만 같았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들끓는 삶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던 눈이었다.
작가님을 보며 생각했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구나. 꿈꾸는 사람은 영원히 늙지 않는구나. 그리고 이어서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네 나이에 불가능이라거나 할 수 없을 거라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하고 오직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뛰어든 여유재순 작가님의 이야기가 더욱 와닿을 시다. 인터뷰의 끝을 이 시로 마치며, 새로운 시작의 기로에 있는 모든 분들이 언제고 새로운 꿈을 꾸며 용기 있는 시작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ㅡ
청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어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게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ㅡ
✱ 여유재순 작가 님의 인터뷰 영상으로 보기
𝗖𝗮𝘀𝘁 여유재순
𝗩𝗶𝗱𝗲𝗼 & 𝗘𝗱𝗶𝘁 Dayeoun Lee
𝗠𝗼𝘁𝗶𝗼𝗻 𝗚𝗿𝗮𝗽𝗵𝗶𝗰 Jieun Lee
𝗣𝗵𝗼𝘁𝗼 Choemore
𝗘𝗱𝗶𝘁 Yesi Choi
𝗗𝗲𝘀𝗶𝗴𝗻 Jaehyung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