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감각과 성정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거나 감각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고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의 천성을 강점으로 승화시키곤 한다.
자유로운 형태의 구조물과 캐릭터를 여러 재료와 방식으로 풀어내는 차인철 작가, 패션을 기반으로 콘텐츠, 출판, 전시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더 프레이즈 김누리 대표, 꽃과 나무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내추럴리내추럴의 박동제・임다연 대표는 세심하고 민감한 감각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마주할 때마다 타고난 감각의 레이더를 적절히 활용하며 크나큰 희열과 성취감을 느낀다.
자신만의 기민한 감각과 능력을 명민하게 자각하고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아는 이들에게 예민함은 더 이상 양날의 검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반짝일 수 있는 원석이자, 잘 다듬어진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지나칠 수 없다.
“자신의 타고난 감각을 어떻게 장점으로 만들었나요?”
대학에서 제품과 공간 디자인, 텍스타일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며 폭넓은 재료와 제작 과정을 두루 습득했어요. 덕분에 그래픽 디자인부터 일러스트레이션, 회화까지 여러 표현 방식을 과감히 실험할 수 있었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앞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자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래야 그에 맞는 새로운 감각을 발휘할 기회가 생기니까요.
그래픽 디자인을 기반으로 디지털 아트 작업을 선보이며 패션, 전자, 테크, F&B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해 왔어요. 최근에는 올리브영과 ‘올영 세일’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개인적으로도 결과물이 무척 만족스러웠죠. 지난해에는 오랫동안 준비한 아트워크 작업으로 개인전을 열었어요. 처음에는 온라인이 아닌 캔버스에 작업하는 것이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졌는데, 작가로서 새로운 영역을 구축할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이를 통해 예술의 범위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많이 얻었죠.
현재의 작업을 위해서는 다양한 감각과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이를 위해 몸과 마음의 상태를 늘 올바르고 평온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감각은 결국 제 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거나 불편해지면 원활한 작업이 어렵거든요. 그래서 잘 먹고, 잘 자는 평범한 하루 루틴을 규칙적이고 건강하게 유지하려 해요.
최근에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로서의 작업을 병행하느라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일부러 SNS와 조금 거리 두기를 시도했더니 점차 마음이 고요해지고 건강해지는 걸 느꼈어요. 이전에는 제가 하는 작업이나 추구하는 스타일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어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누군가와 저를 비교하며 조바심을 내기도 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불필요한 걱정을 덜어내니 더욱 편안하게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내 안의 에너지와 타고난 감각을 고유한 장점으로 받아들이자 자존감이 높아지고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 거죠.
Interviewee 차인철 작가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 디자인, 브랜딩, 아트워크 등의 작업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스타일과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취향을 담은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오랜 고민과 숙원이던 아티스트로서의 데뷔를 무사히 마친 지금은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이다.
서울 서촌에 위치한 아트 북 서점 ‘더 프레이즈(The Phrase)’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며, 패션 브랜드 광고와 룩 북 촬영을 비롯한 비주얼 디렉팅, 프로덕션, 스타일링 작업을 하고 있어요. 패션을 기반으로 출판과 팝업, 전시, 공간 디렉팅은 물론이고 준지, 논픽션 같은 브랜드를 위한 북 큐레이션 작업도 맡고 있습니다. 사진가 신선혜, 최용준의 사진집을 출간하고, 팝업 스토어와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죠. ‘구절’이라는 뜻의 ‘더 프레이즈’라는 이름은 우리만의 이슈를 만들고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자 붙이게 되었어요.
작업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살펴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때마다 더 프레이즈는 저와 팀원들에게 훌륭한 도서관이 되어줍니다. 다양한 책을 가까이하며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요. 해외 출장 중에도 전시를 보거나 파머스 마켓을 방문하고, 현지 공예품을 찾아보며 패션과 예술, 공예 분야에서 참신한 영감을 찾으려고 합니다.
더 프레이즈와 협업해 온 브랜드들은 대부분 2년 이상 오랫동안 손발을 함께 맞춘 곳이에요. 그래서 한 브랜드의 비주얼 톤 앤 매너를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도, 작은 변주를 통해 새로움을 더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도 즐거운 일이죠. 최근에는 리뉴얼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원하는 브랜드에서도 의뢰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 역시 흥미롭게 작업하고 있어요.
시작부터 함께한 브랜드에는 자연스레 깊은 애정이 생겨요. 2년 전 론칭한 ‘디 애퍼처(The Aperture)’는 첫 시즌 캠페인부터 비주얼 작업을 함께해 왔는데, 3년째 전속 모델로 활동 중인 일본 모델 겸 배우 모토라 세리나도 저희가 직접 추천하고 캐스팅했어요. 대중에게 새로운 브랜드와 신선한 얼굴을 알리는 데 적합한 역할을 수행한 것 같아서 저희에게도 오래 기억될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 업계에서 일하려면 남다른 예민함과 기민함이 필수적이에요. 이런 감각이 가끔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을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덕분에 지금까지 뒤처지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며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민한 시선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며,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뒤 프로젝트마다 적재적소에 알맞게 대입하고 풀어내는 기민한 태도야말로 이 일을 하는 데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니까요.
Interviewee 더 프레이즈 김누리 대표
학창 시절부터 잡지를 사랑하는 ‘매거진 키드’였던 소녀는 패션 매거진 에디터가 되었고, 남편과 함께 ‘더 프레이즈’라는 이름의 유니크한 아트 북 서점을 열었다. 프로젝트마다 그에 맞는 이슈와 이름을 붙이며 ‘구절’이라는 의미에 어울리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중순에는 새로운 국내 사진가와 함께 사진집 출판을 준비 중이다.
임다연 같은 회사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하며 식물 관련 아이템을 디자인하다가, 운명처럼 식물의 매력에 빠졌어요. 자연 수형 분재 장인에게 수업을 받고 야생 초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을 알아가면서, 이 분야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내추럴리내추럴’은 이름 그대로, 자연의 멋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살린 식물들을 선보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브랜드입니다. 분재를 비롯한 실내외 식물 작업, 식물 상담 및 컨설팅, 그리고 전자, 패션, F&B 등 다양한 브랜드의 조경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 브랜드가 지닌 고유한 스토리와 아이덴티티를 조경 속에 녹이려 노력해요. 공간 속 식물 하나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듭니다.
박동제 최근 서울 북아현동 이층집에 ‘내추럴리내추럴 홈’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쇼룸을 열었어요. 실제 생활 공간에서 식물이 놓인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서 곳곳을 거실이나 서재처럼 편안하고 안락하게 꾸몄죠. 특히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국내 다다미 장인과 함께 제작한 좌식 룸에는 내추럴리내추럴만의 미학을 담았습니다. 누구나 신발을 벗고 올라가 이 공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요. 계절에 따라 소나무, 배롱나무의 잎과 꽃이 변하는 정원의 풍경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섬세하고 예민한 관찰력을 갖춰야 해요. 식물이 아프기 시작하면 작은 신호를 보내는데, 그 순간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해결해 줘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쇼룸의 식물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살피며 돌봅니다. 농장에서 꽃과 나무를 구입할 때도 뿌리까지 튼튼한지 꼼꼼히 확인한 뒤 선택하고요. 무엇보다 식물과 자연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저희는 각자의 예민함이 달라요. 한 사람은 비례와 비율에 대해 신경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구조와 마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덕분에 서로의 시각이 보완되어 함께 더 즐겁게 작업할 수 있어요. 때로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고된 노동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드넓은 땅을 어떻게 하면 낭만적인 정원으로 만들 수 있을지 막막할 때도 있지만, 서로의 감각과 능력을 믿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Interviewee 내추럴리내추럴 박동제・임다연 대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부부는 식물을 통해 자신들의 감각과 영감을 표현하고자 플랜트 디자인 스튜디오 ‘내추럴리내추럴’을 설립했다. 지난해, 성수동에서 북아현동의 한적한 골목으로 쇼룸을 옮기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고, 이제 그곳에서 더 많은 꿈과 가능성을 펼쳐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