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differ column
디퍼 칼럼은 필진마다 3회 차에 걸쳐 하나의 주제를 풀어가는 연재물이며, 책상에서의 몰입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 배움, 창작, 일 등에 대한 심층적인 사유와 정보를 전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뇌를 자극할 때, 기분 좋은 깨우침이 일어날 거예요.
나에겐 오래된 책상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래된 책상과 오래도록 함께 늙어가고 싶은 꿈이 있다. 오래된 꿈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 꿈을 이뤄버렸다. 지금 이 글도 20년 된 나의 책상에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정도 시간에 만족할 생각이 없다. 20년이라니, 그건 이 책상에게 너무 애송이 같은 시간 아닌가. 나는 나의 반려 책상과 같이 평생 늙어갈 생각이니 말이다.
20대의 어느 날이었다. 영어학원에서 나는 운명적 장면을 마주친다. 선생님이 틀어준 영상에서 한 여자가 삼각형으로 움푹 파인 자국이 있는 책상을 소개했다. 여자는 그 부분을 손으로 만지며 이야기했다. “저희 어머니가 평생 세탁소를 하셨는데, 이 자리가 다리미를 놓았던 부분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저는 그대로 식탁으로 쓰고 있어요.” 그날 수업 시간에 뭘 배웠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식탁의 그 다림질 자국 만큼은 내 마음에 제대로 자국을 내버렸다. 나에겐 나와 같이 늙어갈, 세월의 자국을 그대로 담을, 반려 책상이 필요했다.
운명적 책상을 원하는 내게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운명적으로 그때 마침 친구가 목수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신입사원 월급의 상당 부분을 털어 친구에게 책상과 책장을 주문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가! 친구는 초보 목수답게 큰 실수를 해버렸고, 덕분에 나는 여름이면 모서리가 벌어졌다가 겨울이면 오므라드는 책상을 가지게 되었다. 운명적으로. 친구는 두고두고 미안해 했지만, 나는 내 책상에 두고두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겨서 기쁘기만 했다. 이제 이 책상 앞에 오래오래 앉아서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땐 그런 줄 알았다. 20대의 나는 세상을 잘 몰랐으니까.
알고 보니 세상은 정신이 없는 곳이었고, 내가 다닌 광고 회사는 정신없이 살게 만들기로는 세계 최강의 능력을 보유한 곳이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버젓이 내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퇴근하고 책상 앞에 한 번 앉아보지도 못한 채로 지낸 시간이 길었다. 침대에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날들도 많았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점점 나의 책상은 식탁으로 변해갔다. 책상 위엔 책 한 권 없이 잡동사니만 쌓여갔다. 그렇게 회사에 다니는 동안 7권의 책을 쓰며 작가로도 살았지만, 그것이 꼭 내 책상과 오래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부족한 시간의 틈을 벌려 글을 써야 했다. 점심시간 카페 테이블과 회의실 테이블, 촬영장 대기 시간의 간이 테이블이 나의 책상이 되곤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회사를 다닌 끝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20년 만의 일이었다.
20년 만에 퇴사라는 결단을 내린 나에게 사람들은 끝없이 질문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냐고. 내가 궁금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길래 그토록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둔 걸까, 나는. 하지만 아무리 집요하게 물어보아도 내겐 답이 없었다. 답도 없고 대책도 없었지만, 갑자기 내게 넘치도록 많아진 것이 있었다. 바로 ‘시간’. 이제부터 넘치는 시간 동안 그 답을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20년 넘게 수많은 광고주의 답을 찾았는데, 이제야 내 답을 찾을 시간이 온 것이었다.
마침내 내 오래된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앉았고, 밤늦게 잠들기 전까지 앉아 있었다. 간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빨리 씻고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었다. 20년 만에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와 책상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뭘 하고 싶니. 뭘 하고 싶어서 회사까지 그만둔 거니. 답을 찾기 위해서는 어디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니. 혼자서 고민한다고 찾아지겠니. 누구라도 만나야 하는 거 아니니. 나는 나를 채근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책상 앞에 앉아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디로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20년 동안 매일, 나가기 싫어도 나가야만 했다. 근데 또 나가야 한다고? 동시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20년 동안 매일,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났지만, 만나기 싫은 사람들도 만나야만 했다. 내향형 인간이자 동시에 지독한 집순이인 인간에게는 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이제서야 내 집, 내 책상 앞에 마음껏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딜 또 나간단 말인가? 누굴 또 만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속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내 눈앞에 오래전 목수 언니가 만들어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빼곡한 책들이 보였다. 그곳이었다.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그 사람들이었다.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마음껏 책 속을 여행하며, 그 속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생각에 젖어 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잘 소화해 현실 속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어디서? 다름 아닌 나의 책상에서. 바로 그것이 오래도록 내가 진심으로 바란 일이었다.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북클럽을 해야겠다는 바람이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태어나고 있었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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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r. 김민철(@ylem14)
20년 동안 광고 회사를 다니며 ‘일룸’의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오독오독 북클럽 운영자이자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정형의 삶⟫, ⟪내 일로 건너가는 법⟫, ⟪모든 요일의 기록⟫ 등의 책을 썼다.
𝗘𝗱𝗶𝘁 Haeseo Kim
Illustration Eomju
𝗗𝗲𝘀𝗶𝗴𝗻 Jaehyung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