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팕의 직업은 ‘요리먹구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직업명인데, 그 뜻을 물어보니 명확하고 간결한 해설이 따라붙는다. “저를 정의할 말이 필요했어요. 요리 연구가까지는 아니지만 요리를 ‘먹구’ 가게 하는 건 자신 있었거든요.” 그는 요리하고 내어주는 일을 한다. 요리를 매개로 클래스를 열기도 하고, 일에 관한 인터뷰도 한다.
이탈리아어를 전공했다. 전형적인 문과 학생이었는데 대기업 개발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하고 싶었던 일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불쑥 내민 지원서가 합격 소식을 물고 왔을 땐 어찌 됐든 기분이 좋았다.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고 거기다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 사원이 된 것이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입사 후 교육 기간에는 잠깐 큰 꿈을 키워보기도 했다. “이참에 나도 스티브 잡스처럼 융·복합형 인재가 돼보는 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간지럽기도 했다. 설렜다.
큰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본격적인 업무에 투입되자마자 자신의 길이 아니란 걸 바로 깨달았다. 일하는 매 순간 괴롭고 힘들었지만 쉽게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고, 서울살이를 이어가야 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찾아낸 것이 ‘요리’와 ‘독립 출판물’이었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오래된 꿈을 꺼내어 독립 출판물 클래스를 신청했고, 써놓은 글을 엮어 3권의 책 <웃_픈>, <우_잉>, <도시시>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에리카팕’이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새로운 이름을 얻은 것만큼 새로운 삶의 결들이 생겨났다.
요리는 일상에서 쉽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만든 것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사람들을 초대해 250번이 넘는 집들이를 하면서 함께 먹는 시간의 가치를 몸으로 경험하고 나니 먹고 웃고 이야기하는 일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든 게 ‘잇어빌리티’와 ‘함바데리카’다. 잇어빌리티는 1인 가정이 쉽고 간편하게, 있어 보이게 먹는 능력을 알려주는 클래스인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좋아하는 일의 실체를 찾게 됐다. “‘이게 천직이라는 거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생각해 보니 저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나를 보여주고 함께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대학을 갈 때도, 입사를 할 때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사람들은 일과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일할 때 즐거운지 괴로운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함바데리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에리카의 함바’라는 뜻인데 ‘함바집’에서 볼법한 평범하고 소박한 한식을 내어주고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웹 디자이너, 배우, 콘텐츠 기획자, 안무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며 각각의 일과 일상, 자신과 꿈에 대한 말들을 나눴고 그러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함바데리카를 하고 난 뒤 제게 강력하게 남은 메시지는 맹목적으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스톱’해 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제동을 걸어보신 분들이 확실히 결이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시기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그 시간을 갖게 되면 빠르게 추진력을 얻게 되는 거고, 늦은 나이에 하게 되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 나에 대한 데이터가 쌓였기 때문에 더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거고요. 어느 시기이든 중요하지 않으니 꼭 한 번 멈췄다가 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다시 걸어가면 좋겠어요.”
사회 초년생 시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스톱’하고 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좋아하는 일을 생각했고, 가볍게 시도해 보며 진짜 좋아하는 일이 맞는지 가늠해 보았다. 작고 가벼운 도전을 거치며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일련의 경험을 통해 그에게 직업은 생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아이텐티티를 최대로 끌어올려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어떤 직장, 어느 부서에 다니는 사람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잘 담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진짜 직업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의 일로써 주변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천직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