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자리한 어느 건물 5층에 오르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노래방, 술집, 고깃집 등 노포로 가득한 회색빛 거리와 대비되는 초록빛 생명체가 옥상에 가득한 것이다. 마흔다섯 개의 화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감자. “올해 초 미국에서 팬데믹과 기후 변화로 인해 감자 작황이 잘되지 않아 국내 감자칩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식량 문제가 바로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내 먹거리를 직접 키워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어요.” 공연 프로듀서인 조휘영은 커뮤니티 공간 ‘콥랩(Cobb lab)’으로 운영 중인 자신의 옥탑방에서 감자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떻게? 농사는 소소한 노력이 꾸준히 필요한 작업이다. 그는 혼자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아래 인스타그램을 통해 프로젝트 참여자를 구했다. 직장인을 위한 커뮤니티 ‘낯선대학’에서 만나 친분을 쌓아온 을지로 와인 바 ‘십분의일’ 대표 이현우, 식품 관련 마케터인 문지영(문차)을 포함해 8명이 모였다. 그중에는 지인도 있지만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만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치과의사, 대학원생, 마케터 등 직업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목표만은 같다. 자급자족, 스스로의 힘으로 감자를 수확하기.
“첫 만남의 자기소개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과 평소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며, 이를 토대로 프로젝트 내에 각자의 역할을 정했어요.” 본업 외에 부수익을 만들고 싶은 목표를 지닌 이는 농사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에 올리는 역할을 맡고, 자신이 선곡한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이는 감자의 성장을 돕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DJ를 담당하는 등 각자의 꿈에 근접한 역할을 정했다. 그러고는 CFO(Chief Farmer Officer, 농업 총괄), CYO(Chief Youtube Officer, 유튜브 총괄), CMO(Chief Music Officer, 음악 총괄)처럼 회사의 임원급과 같은 직함명도 붙였다. 여러 ‘칲스Chiefs’가 모였기에 크루 이름도 ‘감자칲스’로 결정했다.
“크루를 모집할 때 특정 직업이나 능력을 토대로 찾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꼭 있어야 하는 팀원을 꼽자면 디자인 능력이 있는 친구예요. 하나의 사이드 프로젝트가 로고나 SNS 피드, 포스터 등으로 시각화되면 크루들이 소속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거든요.” 무형의 프로젝트를 시각화해 보여주는 디자인 결과물은 내부적인 결속력과 동질감은 물론이고 다양한 형태로 외부에 프로젝트를 알리는 역할도 한다.
“감자는 다른 작물에 비해 난이도가 가장 낮은 편이에요. 좋은 씨감자를 구해 심은 뒤 땅이 마르지 않게 물만 주기적으로 주면 되거든요. 고구마와 당근 같은 다른 구황 작물과 달리 땅의 양분도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화분에서도 키울 수 있어요.” 감자 파동을 계기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기에 첫 작물로 자연스럽게 감자를 택한 것인데, 초보 농부인 감자칲스에게 감자는 첫 농작물로 제격이었다. “처음 준비할 때는 조금 난항을 겪긴 했어요. 예를 들어 대량으로 씨감자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은 농업기술센터뿐이거든요. 주변을 수소문해 농부에게 겨우 씨감자를 구입했어요. 혼자였다면 시작 단계에서부터 포기했을 것 같아요.” 어렵게 구한 씨감자를 올해 3월 말에 파종했다. 초보 농부이지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인 비나리 같은 행사도 진행하며 1알의 씨감자를 10알의 감자로 키워냈다. 이렇게 키운 감자는 7월 초에 수확할 예정이다.
“날씨에 따라 물 주는 주기가 달라져요. 요즘처럼 햇볕이 뜨거울 때는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주어야 하죠. 매달 ‘주주총회’라고 이름 붙인 모임을 여는데, 이때 물 주는 스케줄을 짜요. 여럿이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실제로 물을 주러 오는 날은 많지 않습니다.” 급작스럽게 물 당번 스케줄을 지키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날짜를 바꿔주기도 한다. 크루를 운영하는 3개월 동안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었던 건 단순히 서로의 선의 때문이었을까?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만약 감자를 팔아서 수익을 내겠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이 일한 만큼 합당한 수익을 가져가고 싶을 거예요. 각기 다른 바람을 가지고 있기에 그 목표를 하나로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고,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목표에 우선 도달하고 그 후의 지향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방향이 좋은 것 같아요.” 경험 자체에 가치를 두고 설정한 작은 목표를 이루는 것. 감자칲스는 감자를 성공적으로 수확하면 또 다른 작물 재배에 도전하거나 수확한 감자로 파티를 열 계획을 세우는 등 프로젝트의 확장을 꿈꾸고 있다.
“감자 농사 자체로 수익이 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하나의 사이드 프로젝트가 징검다리가 되어 또 다른 일로 뻗어 갈 수는 있습니다.” 9명의 친구와 사이드 프로젝트로 와인 바, 십분의일을 운영 중인 이현우는 이를 통해 책을 출간하고 작가가 된 자신의 경우를 예시로 들었다. 작가가 된 그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관련된 강연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또 한 권의 책을 내고자 브런치에 감자 농사 일지를 정리하고 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각자 만들고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다른 셈이다.
감자칲스의 리더인 조휘영은 도시 농사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어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지역의 농가를 방문해 과일을 수확하고 이를 통해 저장 식품을 만드는 ‘파파푸파푸’다. 감자칲스 크루를 모을 때처럼 같은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사람을 모집했다. 이 밖에도 연극, 조찬 모임, 대형 레고 조립 등 여럿이 모여 함께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그의 아지트 콥랩에서 열고 있다.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고, 때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는 자아인 ‘부캐’로 활동하며 수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환기해 본업에서 더 나은 결과물을 낼 수도 있어요.” 지금처럼 콥랩은 작지만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해 더 다양한 사람들을 부를 예정이다. 하나의 목표를 통해 다양한 꿈을 이룬 제2의 ‘감자칲스’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