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권태와 무기력에 얻어맞아 쓰러지는 가냘픈 인간이다. 월요일 다음은 화요일, 그 다음은 수요일, 그렇게 며칠 더 지내면 잠깐 기쁜 주말. 몇 달이 훌쩍 지나가고, 곁이 쌀쌀해진다 싶으면 일 년이 홀랑 지나가버리는 이 반복의 시간 위에 내가 있다. 파도 없는 수면경 위에 서있는 따분한 서퍼처럼. 나는 늙어가고 병들다 죽겠지. 생각의 관성으로 고꾸라지는 속도만 놓고 봐서는, 인간은커녕 자동화 기계라 불러도 좋겠다.
한동안 무기력 주간이 찾아와 쩔쩔매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허기가 지면 아무거나 먹었다. 몸이 무겁게 쏟아지는 것 같아 가누기가 힘들었다.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이따금 남편에게 으스대며 던진 농담은 이런 내용이었다. “봤지? 불행은 나를 다 비껴 가. 행운도 그렇단 얘기지. 어제도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야(웃으면서 이런 말을 잘도 한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산어귀에 도착하면 수령을 짐작해볼 엄두도 나지 않는 고목들이 보였다. 봄이면 연둣빛 신엽을 꾸역꾸역 밀어올리고 있었고 가을이면 끝장을 각오한 주먹처럼 붉은 잎사귀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울렁거렸다. 슬프게 보였다. 그러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항상 같은 나무를 보고 놀라곤 했다. 봄이면 연둣빛 신엽이 눈부시게 상쾌했고, 가을이면 절정을 불태우는 에너지에 경건했다. 오르기 전의 나무와 내려오고 난 후의 나무는 같은 모습인데, 정말로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나무의 둔갑술인가.
하루는 개화가 한창인 벚나무를 망연히 올려보다가 궁금해졌다. 꽃이 피었는데 왜 내가 슬픈 것인지. 슬픔을 추적하여 이리저리 살펴보았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시 한 편을 읽고 단숨에 알아버렸다. 나무는 있는 그대로일 뿐. 슬픔에 침잠한 내가, 나의 안쪽에서 허우적거린 것일 뿐. 나의 사랑이나 나의 증오로는 저 나무를 티끌만큼도 물들일 수 없음을. 나의 감정과 무관한, 진짜 나무의 독립을. 알아버렸다.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이나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구에서다.
거울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이나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
나는 잔혹하지 않고, 다만 충실할 뿐.
모서리가 네 개인 작은 신의 눈.
대부분의 시간 나는 반대편 벽을 응시하지.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벽이
깜빡거리고 얼굴들과 어둠이 우리를 자꾸 갈라놓지
(중략)
내 속에 그녀는 어린 여자애를 빠뜨렸고, 내 속에서 늙은 여인이
날마다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시 <거울(Mirror)>, 최영미 옮김.
거울을 잘 닦아놓을 일이다.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출렁일 수 있으니. 수면경 속에 나의 어린 여자애를 빠뜨리고, 늙은 여인을 건져 올리며 까무러치지 않도록. 나의 중심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네 개의 모서리로 시선을 보낼 일이다. 작은 신의 눈이 깜빡이고 있는 거울의 모서리에 뜻밖의 이해가 입장하도록. 거울 위에 서서, 파도를 만난 적 없으니 바다를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는 없다.
텔레비전 속에서 배우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그의 눈동자는 오직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게 어디인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몸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기보다 자신의 몸 안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절망에 빠뜨린 과거가 몸의 내부에 상영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마도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배우는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아는 상실의 이미지가 아니다. 화면 위로 감정을 띄워 올리려면 군더더기를 지워야 한다. 평면의 소통방식이다.
진짜 세계라면? 저토록 깊은 절망감을 안고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사람이 나라면? 나는 눈곱만큼도 절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 전방위에서 나에게 도착해오는 수많은 감각의 자극과 물리적 충돌로부터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살펴야 할 테니까. 눈동자가 데굴데굴 바빴을 것이다. 그런 얼굴이 절망일 리가.
화면 속 세계에는 없는 것들이 진짜 세계에는 있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처박고 걷는 행인과 서로를 부둥켜안는 데에 온 신경이 쏠린 부주의한 연인들, 리드줄 하나에 강아지 세 마리를 바글바글 달고 가느라 삼등분으로 쪼개질 듯 한 동물애호가, 우회전 차량, 점멸하는 녹색 불에 전력으로 달려오는 자전거, 그들은 평면에 없고 입체에 있기 때문에. 진짜 세계는 소란스럽고 난분분하며 재빠르다. 진짜 세계는 절망에 집중한 나에게로 돌진해오며 나의 절망에 예고 없이 침범할 뿐더러 종국에는, 절망은 까맣게 잊고 또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허기지게 만든다. 그렇다. 예측불가능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예측불가능의 훼방꾼들이야말로 나의 이웃이다. 삶의 공포도 그들이 선사하는 것이며 삶의 아름다움 역시 그들이 건네준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깥을 보기. 나의 삶은 평면이 아니고, 나는 정해진 시나리오를 배회하는 배우가 아니므로. 내가 아닌 것을 만나기. 내가 아닌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고 때로는 꼴 보기 싫은 것들이나, 나에게 내린 뿌리를 딛고 밖으로 뻗기. 중심으로부터 끝없이 멀어지는 고목들이 알려준 것이다.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중략)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후략)
– 김수영의 시, <꽃잎 2>
권태 속에서 눈 멀어버리는 일은 죽음과도 같다. 불안으로 깨어있는 리듬만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이 무기력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가 되어준다는 사실. 예측불가능성, 시를 부르는 다른 이름 아닌가.
이 시에서 김수영은 반복을 통해 리듬을 읽게 하고, 변주를 통해 삶을 드러낸다. 앞에서 하던 비유를 마저 끌어온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통해 파도 위에 서게 하고, 변주를 통해 바다를 보게 하기. 내가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그들을 이웃이라 부른 뒤에는 노란 꽃으로 바꾸어 읽어도 좋겠다. 예측불가능한 그들이 나의 삶을 아까와는 다른 시간으로 바꾸어놓고, 뜻밖의 일을, 거룩한 우연을 만들기도 하니까.
마지막으로 제목에 책임을 지는 일이 남았는데……. 내가 무어나 된다고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조언이나 충고(“햇볕을 많이 쪼이세요” 같은…)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첫 문장에서 밝혔듯 무기력기에 접어든 사람은 나다.), 무기력기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이 긴 글을 대강대강 눈으로 훑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이렇게 요약해볼까.
미워죽겠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라. 미워죽겠고 꼴도 보기 싫었던 이유를 전부 잊어라. 지금부터 아까와는 다른 시간이 분명하다. 당신의 앞에 불려나온 사람은 당신 자신일 것이니까. 있는 그대로 그를 대하면 된다.
Writer 유계영
시인. 2010년 <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으로부터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