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 보였다. 아무리 소년 만화가 성장 서사를 다룬다고 한들 주인공이 이토록 천둥벌거숭이 같아도 되는 될까? <원피스>를 처음 접한 당시의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전투나 액션이 묘미인 학원물을 섭렵했던 터라 몽키 D. 루피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약한 사람인지 한눈에 이해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약해 빠진 소년이 바다를 누비며 적과 끊임없이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앞섰다. 아무리 봐도 그가 해적왕은커녕 바다로 나가 적들과 맞서 싸우는 것조차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나마 유용해 보이는 전투 능력은 ‘고무고무 열매’ 능력자라는 것인데, 그 또한 몸을 풍선처럼 늘이고 줄이는 게 다였고, 음식을 욱여 넣는 것과 총알을 튕겨내는 것 외에는 큰 쓸모가 없어 보였다. 칼로 날아오는 총알을 베는 검사劍士가 존재하는 <원피스>의 세계관에서 총알을 튕겨내는 것쯤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것만큼 당연해서 유용하지 않은 전투 능력이었다. 과연 루피는 해적왕 ‘골 D. 로저’가 남긴 보물 ‘원피스’를 찾아 해적왕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악랄한 해적들이 판치는 대해적 시대에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그만두고 더 강한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나 봐야 하나 싶던 때 그의 남다른 투지가 보였다. 여전히 약했지만, 어떤 적과 만나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의수 대신 한 손에 도끼를 단 모건 대령과 싸울 때도, 50척이나 되는 대함대와 5천 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을 지휘하는 돈 클리크와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루피는 처참히 깨져도 다시 일어나 싸웠고, 끝내 승리했다. 루피는 점점 강해졌다. 전투에서 승리할 때면 동료도 생겼다. 모두 출신은 달라도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굳센 동료다. 세계 제일의 검호가 되겠다는 검사 롤로노아 조로, 루피를 따르며 요리사들의 낙원과도 같은 ‘오올 블루’를 찾겠다는 상디 같은 강한 전투 요원은 물론이고, 몸으로 날씨의 변화를 예측할 만큼 뛰어난 항해사 나미 같은 금쪽같은 동료도 얻었다. 루피는 처음부터 그랬듯, 멍청할 만큼 단순하게 해적왕을 목표로 나아갔고, 동료들은 그런 그에게 마음을 포개며 한 배에 올랐다. 루피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막무가내 기질은 한편으로 목표를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투지이기도 했다. 한길만 걷는 우직한 소년은 행동으로 주변의 신뢰를 샀고, 판도를 뒤집었다. 어느새 루피는 해군에서도 특별 감시할 만큼 꽤 강한 해적이 되었다.
루피의 성장은 단순하지만 맹렬하다. 특히 동료를 비롯한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순간이면 더욱 초인적인 힘을 냈다. 동료 니코 로빈이 해군에 잡혀 갔을 때는 혈혈단신 달려갔고, 의형제 포트거스 D. 에이스를 구하기 위해 해군의 총 전력이 있는 해군 본부에 침투하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든, 얼마나 강하든 개의치 않았다. 다만 지키고 싶은 사람과 목표가 있다면 부딪혔고 끝내 해냈다. 루피의 밀짚모자 해적단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루피는 전장에서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적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믿음직한 남자였다. <원피스>의 분기점과도 같은 ‘정상 전쟁’ 에피소드에서 처음 본 해적들마저 그를 따르는 걸 본 세계 제일의 검호 미호크의 “루피는 이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주변을 동하게 하는 그의 투지를 향한 찬사와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피는 열일곱의 나이에 해적왕이 되겠다며 바다로 홀로 나설 때 가장 먼저 “우선은 동료 모으기야”라고 외쳤을 만큼 동료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그는 마음 맞고, 믿음직한 동료들을 차근차근 자신의 배에 태웠다. 밀짚모자 해적단원들은 입을 모아 루피의 정의감에 반해 그를 따르게 됐다고 한다. 어인섬이 사황 빅 맘 해적단에 의해 탄압받고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자신의 해적 깃발을 빌려주기도 했고, 드레스로자 왕국이 칠무해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와 그의 해적단에 의해 나라가 망가지고 있을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들을 무찔렀다. 덕분에 밀짚모자 해적단은 산하에 일곱 개의 해적단과 5,640명의 부하를 거느린 대선단의 수장이 되었다.
누구나 해적왕을 꿈꾸며 바다로 나오지만 그 무모한 꿈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루피 또한 목표를 위한 첫걸음이 가장 첫 번째 결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단을 이루기 위해 넘어지고, 깨지고, 때로는 결투에서 패배할지언정 자신의 꿈이 박살 난 건 아니라는 듯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이 모든 결과에 앞서 그가 특출한 능력 없이 이룬 성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있는 건 오로지 동료들과 무모함뿐이었다.
<원피스>가 첫 연재를 시작한 1997년으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깨달은 건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는 이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너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은 게 아닐까. <원피스>를 초등학생 때 처음 접한 나는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루피는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해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한 사내가 되었다. 10여 년 전, 약해 보이기만 하던 천둥벌거숭이 소년은 어느덧 걸출한 해적이 되었고, 해적왕이라는 자리도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