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Hannah Gadsby: Nanatte)〉(이하 〈나네트〉)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정석을 보여준다. 쇼가 시작하고, 한 여자가 무대에 들어선다. 열화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진다. 홀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그의 차림새는 좋게 말해 깔끔하다. 정확히 말하면 방금 집에서 나온 사람 같다. 그의 이름은 해나 개즈비, 덩치는 웬만한 성인 남성만큼 크고, 얼굴엔 화장기도 없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걸쳤고, 머리는 새집을 지은 것처럼 자유롭다. 무대에는 마이크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는 그 앞에 가서 서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제 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잠깐, 저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My show is called Nanette.
제 쇼의 제목은 ‘나네트’예요.
And the reason my show is called Nanette, is because I named it before I wrote it.
나네트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걸 쓰기 전에 제목을 정했기 때문이죠.
I named it at around the time I’d met a woman called Nanette.
예전에 나네트라는 여자를 만나던 때에 짓게 됐어요.
Who I thought was very interesting.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었죠.
So interesting. “Nanette.”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생각했어요. “나네트.”
I thought, “I reckon I can squeeze a good hour of laughs out of you, Nanette, I reckon.”
“네 옆에 있으면 한 시간 동안 웃기만 할 수도 있겠어.”
But, turns out…
그런데 알고 보니까
nah.
아니더라고.
이 시답잖은 이야기로 그의 쇼는 시작된다. 문장으로만 읽는다면 농담이라기보다 그저 스몰 토크에 가까울 정도로 실없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할 것 같은 이야기다. 웃기려는 의도 따위는 없어 보인다. 누군가 무대로 그를 떠밀기라도 했나 싶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가장 큰 무대에 선 코미디언이 쭈뼛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습은 놀랍다. 보자마자 반말을 쏘아대고, 보통 사람보다 세 옥타브 정도 높은 목소리로 말하며, 정신없이 웃긴 얘기를 쏟아내어 관객의 혼을 쏙 빼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광의 무대에 있는 대신 언제든 집에 돌아가 티타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언제나 그쪽을 택할 것 같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살면서 그렇게 허름한 주인공들을 본 적이 없다. 당장 밖에 나가서 조금만 둘러봐도 그들보다 버젓하게 차려입은 사람을 수도 없이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 도시 시드니, 그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오페라 하우스를 만석으로 만든 코미디언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그나마 이 쇼에서 해나 개즈비는 내가 본 스탠드업 코미디언 중에 가장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통은 후드 집업에 청바지, 셔츠에 트레이닝 바지가 그들의 암묵적인 유니폼으로 보인다. 마치 그들이 무대에 가져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듯이. 그렇게 시각적으로 볼 것 없는 차림으로 나타나서 그들이 시작하는 이야기는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다. 그들이 대단히 출세했거나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거나 특별한 경험을 했거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궁둥이를 붙이고 듣다 보면, 그는 우리가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는 여성이자 비만이며, 레즈비언이다.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이를 본 적도 있다고 느낄 것이다. 1990년대생들에게 코미디의 기준이 되었던 ‘개그콘서트’나 ‘코미디 빅리그’에서다. 다만 무대 위에서 그들이 주인공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상화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로만 역할했다.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에게 주인공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인물로 학습되었다. 꾸미지도 않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도 않고, 주어진 대사를 말하지도 않는 해나 개즈비는 처음 보는 주인공이었다. 이런 생각마저 든다. “저래도 되는 거였어?”
스탠드업 코미디의 역사를 바꾼 해나 개즈비의 〈나네트〉는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농담, 고백 같은 대서사시가 담긴 한 편의 드라마다. 이 쇼의 골자는 코미디를 그만두겠다는 것인데, 그 화려한 은퇴 쇼가 그를 전에 없이 유명한 이로 만들어 놓았으니 참 농담 같은 일이다. 앞서 인용했던 대사의 앞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것은 그가 ‘말하는’ 쇼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쓴’ 쇼다. 그런 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는 수필과도 아주 닮았다. 수필을 이루는 것이 사람, 공책, 펜이라면, 스탠드업 코미디는 사람, 무대, 마이크다. 농담을 하는 사람조차도 앉아서 글을 써야 한다니 곡할 노릇이다 싶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글이라는 도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동시에 상기하게 된다.
이 쇼를 열 번 정도 돌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시작부터 어색함을 그대로 내보이던 얌전하고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그가 사실은 완벽히 이 쇼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단 한 마디도 빠져선 안 될 만큼 촘촘히 설계된 드라마라는 사실을. 그는 단순히 웃긴 사람, 농담꾼이 아니라 자신이 쓴 이야기를 직접 무대에 펼쳐내는 작가이자 퍼포머였다. 예술의 분야에 있어 이토록 홀로 주인공을 독차지하는 무대가 또 있을까? 관객과의 간극을 좁히는 노련한 시작부터 물을 한 모금 마시는 타이밍,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의 환기와 필요한 순간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몸동작, 목소리의 높낮이•굵기•톤, 말하는 속도까지 치밀하고 리드미컬하고 생생하다.
극도로 계획적이고 몹시 즉흥적이다. 무엇보다 쇼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농담을 멈추는 순간이다. 후반부에 그가 내는 화는 가뭄 속에 내리는 폭우처럼 시원하다. ‘Exist in margin’이라고 그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평생을 변두리에 살아온 그가 제우스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보이는 순간의 짜릿한 전복을 경험한다. 한 사람이 풀어내는 이야기만으로 공연을 보고 있는 수백 명의 관객이 다른 세계로 간다. 농담으로써 농담의 그림자까지 비추어낸다. 그의 모습 그대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어떤 절망은 절대 생략될 수 없다.’는 묵직한 메시지는 농담이라는 옷을 입고 쇼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반짝인다. 생각하게 된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가 그 무대에 서기까지 그 농담들을 얼마나 많이 반복하였을까. 그는 어찌하여 그 무대에 서고자 한 것일까. 어느 순간 내 눈에 그는 생존자로 보인다. 이야기할 수 있어서,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 말이다. 그 쇼에서 선보인 농담은 그로서는 닳고 닳은 농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농담일 것이다. 수많은 작은 코미디 클럽에서 매일 시도했을 농담들. 냉담한 반응과 가끔 들려오는 실소 사이에서 실패하고, 고치고, 다시 도약했을 이야기들. 아무리 말이라도 그 정도로 갈고닦으면 윤이 난다. 그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실패했을 수많은 농담은 그를 비춘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와 그만큼 짙은 그림자 사이 어딘가에 깃들어 있다. 무대 위 코미디언의 말이란 오래 길들인 무사의 칼처럼 반짝인다.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간절한 생명력이다.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치 그가 지금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가끔 나를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부를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그것만큼 곤욕스러운 일이 없다. 마치 가수에게 노래 한 곡을 부탁하듯 “코미디 좀 보여주세요.” 하고 말하기도 한다. 스탠드업 코미디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책에도 ‘도시 풍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양다솔’이라고 떡하니 써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죄책감에 식은땀을 훔치며 손사래를 친다. “별명이에요, 별명.” 뜻 없이 갖게 된 엄청난 이름 앞에서 진정한 농담꾼이란 무엇인지 헤아린다. 동시에 입을 꾹 다문다. 언젠가 그 이름과 닮고 싶어서다. 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그를 떠올린다. 어딘가에서 마주쳤던 누군가의 이름으로 간판을 툭 내걸고 쇼를 열 수 있는 배포, 농담 외에는 어떤 것도 꾸미지 않는 숭고함, 삶의 모든 절망을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내는 기개. 그의 농담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것이 나에게도 무심코 흘러들기를 바라며.
Writer 양다솔
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 발행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