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테이프 아티스트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
Q. 나는 왜 이 사람들을 그릴까?
대체로 상상 속 인물보다는 실존하는 인물의 사진을 보고 작품을 만든다. ‘왜 나는 이 피사체를 선택해 작업을 하는 걸까’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지기도 했다. 뮤즈, 동경의 대상 등 다양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결론은 ‘내가 좋아해서’다. 작가에게 작업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를 정하고 시작하기보다는 일단 작품을 만들면서 내가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로 했다.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유연함을 잃지 말자. 하나의 주제에 갇히지 않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작가가 되려고 한다.
물감 대신 테이프로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나요?
피사체를 상상하기보다는 기존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며 그리고 있어요. 연필로 스케치를 한 후 그 위에 테이프로 채색하는 방식입니다. 테이프 본래의 색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여러 겹을 덧붙여서 또 다른 색을 표현해요. 테이프를 자르고 붙이고, 다시 자르고 붙이는 일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이프는 익숙한 물건이면서도 그림의 재료로는 굉장히 낯선데요. 어떻게 테이프 아트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술교육대학원을 다니다 휴학을 했을 때였어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팔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담이 있었어요. 물감 값도 문제였지만, 정성스럽게 그린 작품이 결국 자리만 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그래서 물감 외에 좀 더 새로운 재료와 작업 방식을 고민하다 신문이나 잡지, 전단지 등을 활용해 콜라주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풀로 붙이는 과정이 너무 귀찮은 거예요. 스티커처럼 쉽게 붙일 수 있는 재료를 찾다 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찾아보니 색깔도 생각보다 다양하더라고요. 그렇게 10가지 컬러의 테이프를 구입해 작품을 시작하게 됐어요.
물감에 비해 컬러 표현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어땠나요?
“만약 다섯 개의 선 또는 백 개의 선을 사용해 튤립 한 송이를 그리라고 한다면, 다섯 개의 선을 사용할 때 당신은 훨씬 더 창의적이 될 것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자신의 책에 쓴 글인데, 마치 제게 해주는 말 같았어요. 테이프는 컬러뿐만 아니라 형태도 직선밖에 없어서 다양한 표현을 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모든 작가가 그렇듯 저도 어렵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거죠. 건물이나 자연이 아니라 인물을 그린 이유도 오히려 테이프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테이프로 피사체를 표현했을 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우선 물감보다 빠르게 그릴 수 있어요.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소재 자체가 지닌 인공적인 느낌이 인물을 만났을 때 더욱 강렬해져요. 컬러 자체도 워낙 강하지만 두 소재의 대비 때문인 듯해요.
테이프를 사용한 첫 작품으로 어떤 인물을 그렸나요?
퍼렐 윌리엄스예요. 당시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였어요. 언젠가 ‘퍼렐 윌리엄스가 사랑한 한국의 작가’로 불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 바람이 강했는지 생애 첫 브랜드 협업을 아디다스와 하게 되어, 그를 다시 한번 그리게 되었어요. 동경하던 인물에게 제 그림을 전한 것처럼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현대카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퍼렐 윌리엄스 외에도 스티브 잡스, 프리다 칼로, CL, BTS 등 다양한 유명인을 그렸어요. 대상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나요?
테이프로 그리면 멋질 것 같은 인물이오. 초기에는 유명인이나 영화 속 캐릭터를 그렸어요. 제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라 대중적인 사람을 그려야 대중이 작품을 알아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 후에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작업했어요. 최근에는 인물 위주에서 벗어나 정물과 풍경을 그리고 있어요. 이것도 일종의 초상화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그리며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는 거죠. 최근에는 호랑이를 그렸어요. 올해가 호랑이해이기도 하고 제가 호랑이띠거든요. 이유가 참 단순하죠?(웃음)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 모든 작업을 단 하나의 주제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작업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사람은 계속 변하고 이것 역시 제 작품에 반영되겠죠. 그리고 클래식한 그림 재료가 아닌 테이프로 작업하기 때문인지 가끔은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듣기도 해요. 그런 말들을 접하면 스스로도 왜 작업을 이어가는지 의문이 들어요.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매년 되풀이되는 것 같은데, 답은 결국 하나더라고요. 그냥 하고 싶어서. 의미를 굳이 붙이려면 만들 수도 있지만 그건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생각을 덜어내고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면 결국 무언가 완성될 것이라 믿어요.
요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종일 작업실에 있어요. 2013년 말, 다시 그림을 그릴 때부터 들인 습관이에요. 시간을 꽉 채워 작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하루 한 번은 반드시 연필을 잡습니다. 일단 연필을 잡으면 뭐라도 만들어지니까요.
단순한 일과지만 9년 동안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가끔 지칠 때마다 고모가 해주신 칭찬을 떠올리곤 해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고모가 엄마 역할을 대신해 주셨거든요. 처음 그림을 배울 때부터 고모가 ‘조 작가님’이라고 저를 부르며 “너는 정말 멋지고,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너의 재능을 다 알아줄 거야”라고 말씀하셨죠. 당시에는 그 말이 좀 창피했어요.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죠.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하잖아요. 고모의 그 칭찬들이 지금까지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주었어요.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로 불리고 싶나요?
‘조윤진 is 뭔들’. 경계와 한계 없이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앞서 말했지만 특정 주제에 갇히기보단 유연한 자세로 작업을 할 거예요. 그래야만 더 오랫동안 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