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픽셀 아티스트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
Q. 이 일이 나의 개성을 대변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음에도 결과물에서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픽셀 아트를 시작하고, 점점 더 많은 피드백과 협업 요청이 들어오면서 이 일이 나의 개성과도 잘 맞는구나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꼭 창의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혹은 일하는 스타일에서 나만의 개성을 갖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재미와 성장
픽셀 아트로 처음 만들었던 게 SNS 프로필 이미지였다고요. 그게 언제쯤이었나요?
2010년 즈음이니까, 픽셀 아트를 시작한 지도 벌써 12년 정도 되었네요. 당시 블로그에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나 여러 이미지를 모아서 올리곤 했는데, 점점 더 유입이 많아지고 스크랩도 많이 해 가더라고요. 그래서 프로필 이미지가 필요해진 거예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서 드로잉도 해보고 이것저것 시도해 봤는데 다 기존에 보던 스타일 같고, 제 색깔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픽셀로 자화상 작업을 했는데 나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프로필 이미지로 등록했더니 주변에서 ‘그게 뭐야?’, ‘너랑 닮았다.’ 이러면서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취미 삼아 친구들 얼굴을 하나씩 작업해 줬는데, 점점 더 많은 사람한테 연락이 오는 거예요.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연락을 받았죠. 그렇게 픽셀 작업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픽셀을 활용할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애니메이터로 오랫동안 일했거든요. 그래서 픽셀이 저에게는 익숙한 요소였죠. 픽셀을 활용하려고 생각했던 시기에 고민이 많기도 했어요. 감독도 해보고 자부심도 있었는데, 결국엔 팀 작업이다 보니 ‘나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기술적으로는 잘 그린 그림이지만 어딘가 매력이 없고 개성이 없는 그림 있잖아요. 제가 만들어온 작품이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픽셀 작업을 하게 됐는데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한 거죠. ‘그럼 이게 내 색깔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과 픽셀 아트는 어떻게 달랐나요? 픽셀의 어떤 매력에 끌렸는지 궁금해요.
창작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방식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어디선가 영감을 받고, 기획하여 만들고, 정리하여 보이는 부분은 말이죠. 가장 다른 부분이라고 한다면 제작 기간이 아닐까 싶어요. 애니메이션은 멈춰 있는 이미지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이 요구되는 종합 예술이니까 작업량도 많아서 대부분이 팀으로 단체 작업을 하고, 완성된 결과물로 선보이기까지 훨씬 오랜 기간이 걸리다 보니 피드백도 그만큼 늦어져요. 그에 비해 픽셀 아트는 훨씬 더 직관적이죠. 단순함에 끌렸던 것 같아요. 초고해상도의 이미지 구현이 가능한 현시대에 일부러 그린 저해상도의 픽셀 아트가 ‘뉴트로’라는 범주에 묶여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요. 단순한 이미지가 더 직관적으로 와 닿고, 그래서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애니메이션의 시장 규모나 비전이 더 탄탄하지 않나요? 픽셀 아트로 아예 전향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요.
사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아동을 위한 수요 외에는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요. 하고 싶었던 방향의 애니메이션 창작은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으면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그에 비해 작업량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거든요.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내가 더 나이 들어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답답했어요. 그때 픽셀 아트가 어떤 해소 창구 같은 게 되어줬어요.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서 조금씩 이쪽으로 빌드 업을 해나갔죠. 독립해서도 안정적으로 픽셀 아트를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회사에 다녀와서 남는 시간에 픽셀 아트 작업을 했고, 꾸준히 SNS에 올렸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씩 반응이 오더라고요. 해외 언론에서 먼저 연락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점점 회사와 병행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가는 거예요. 특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만둔다고 이야기하고 나왔죠.
해외 언론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고요?
자화상 작업이 제 첫 번째 픽셀 아트였어요. 그것의 연장 선상에서 뭘 해볼까 하고 있었는데,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마침 반 고흐의 편지를 엮은 책이었죠. 고흐도 자화상이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고흐의 자화상을 그리되 더 넓은 화각으로, 디테일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려보자 하고 그리게 된 거예요. 이게 명화 시리즈로 이어졌고요. 이후 명화 시리즈를 세 점 정도 비핸스(Behance)라는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올렸는데, 그걸 보고 <ELLE> 프랑스에서 기사를 쓰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명화를 디지털로 재해석했다는 내용으로 웹에 짤막하게 올린 기사였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SNS 팔로어 수가 엄청나게 늘어 있더라고요. 얼떨떨하기도 하고 좋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픽셀을 활용해서 더 재미있는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반응이 원동력이 되어준 거죠.
고흐의 자화상이 픽셀 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만들어준 거네요. 그게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인가요?
그건 좀 달라요.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포트레이트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저는 ‘픽셀 포트레이트 프로젝트(P. P. P.)’라고 부르고 있어요. 처음에는 제 SNS 프로필을 보고 관심을 가졌던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의 초상 작업을 해줬는데, 양이 점점 쌓이니까 이걸 프로젝트 형식으로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어떤 행사에서 캐리커처 같은 걸 해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캐리커처 대신 픽셀 아트로 초상화를 그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988년도에 나왔던 작은 TV 모니터와 제 작업 노트북을 연결해서 픽셀로 작업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걸 또 프린터와 연결해서 그 자리에서 직접 인화해 줬죠. 그 이후에도 전시나 행사처럼 많은 분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씩 포트레이트를 쌓아나갔고, 이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트레이트가 쌓였어요. 모든 사람이 휴대폰의 연락처 이미지, 혹은 SNS나 메신저의 프로필로 쓰이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화면 속 얼굴로 자신을 표현하잖아요. 저는 반대로 제가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을 가상의 픽셀 월드에 저만의 방식으로 모으고 있어요. 가장 처음으로 시작한 작업이기도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행하면서 평생 쌓아가려고 마음먹은 작업이라 애착이 가요.
그 이후에도 개인 작업과 컬래버레이션 작업 모두 활발하게 진행해 오고 있는데, 픽셀 아티스트로서의 본보기가 되어준 아티스트가 있나요?
프랑스의 인베이더(Invader)와 독일의 픽셀 아트 그룹인 EBOY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인베이더는 디지털에서 가져온 개념인 픽셀을 가지고 실물 작업을 하는 작가예요. 타일 한 개를 하나의 픽셀로 생각하고 건물의 외벽에 붙이는 식으로 그림을 완성하죠. 얼굴도 안 알려져 있고 작업 방식도 비슷해서,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뱅크시(Banksy)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아요. EBOY의 경우에는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꽤 오래된 팀인데, 당시만 해도 디지털로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던 때죠. 당연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작업을 시작한 건데, 지금은 이게 레트로한 감성으로 받아들여지잖아요.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고 참 아름다운 이미지로 작업을 해요. 그러니까 같은 픽셀 아티스트라도 느낌이 굉장히 달라요. 픽셀이라는 요소를 공통으로 사용하지만 각자 다르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죠.
같은 장르에 속해 있어도 결국 자신만의 개성을 갖는 게 중요한 거군요.
맞아요. 저는 아무래도 시작을 애니메이션으로 했기 때문에 픽셀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이 저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기본적인 원리는 멈춰 있는 걸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거잖아요. 픽셀도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움직임이 있어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게 있어요. 그게 픽셀의 매력인 거고요. 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픽셀의 고유한 매력은 가지고 가되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부여하고 있어요. 멈춰 있는 이미지보다 더 다채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고, 스토리텔링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픽셀 아트에 적용하고 있는 거죠.
픽셀 애니메이션 중 가장 좋아하는 작업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제 그림을 옆에서 오랫동안 봐온 아내 말에 의하면 <The cat on the rooftop>이라는 작업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애니메이션 작품인데, 배경이 남산이에요. 애니메이션센터도 남산에 있어서 거의 20년 정도 남산 근처에 살았거든요.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고양이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같이 키웠던 고양이에요. 남산과 아내,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죠.
그러고 보니 홈페이지에 ‘LOVE’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더라고요. 그만큼 일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일이 삶에서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일만 하면서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굳이 비율로 이야기하자면 7:3 정도는 되는 것 같네요. 일에 7 정도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요. 인생이라는 게 하루하루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일이라는 건 통제권이 저에게 있고, 그걸 잘 쌓아간다면 삶의 다른 부분에 있어서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제가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게임 속 주인공이 미션을 통과하면서 레벨 업을 하듯이, 저도 여러 작업을 받아 차곡차곡 완료하면서 제 실제 캐릭터도 더 커지고 단단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멈춰 있는 픽셀 작업에서 픽셀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 그만큼 배우는 게 있어요. 스킬의 측면은 물론이고, 스토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는 흐름이라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움직임에 맞춰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을 넣기도 하고요. 그런 시도들이 전부 배움이 돼요. 실물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픽셀은 디지털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실물에 적용하는 건 또 새로운 시도가 되는 거죠. 다양한 협업 제안이 들어오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 성장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을 고르게 되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임하나요?
작업할 때는 작업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엄청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정도로 생각해요. 제가 ‘픽셀로 태어나서 픽셀로 정점을 찍겠어!’ 한 것도 아니고, 저는 단지 좋아하는 걸 찾아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애니메이션도 좋아서 시작했고, 픽셀 아트도 재미있어서 했는데 그걸 또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고요. 그때그때 재미를 느꼈던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나누고 이런 게 또 좋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뭘 좋아하게 될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르겠네요.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제 강점은 움직이는 것에 있어요. 멈춰 있는 이미지보다는 움직임이 주는 매력을 극대화하고 싶은데, AR(증강 현실)을 접목해 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현재 NFT(대체 불가 토큰) 기술을 접목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고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부분에 맞춰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픽셀 아티스트를 꿈꾸는 분들 혹은 낯선 길에 도전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픽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특별히 갖춰야 할 자격 같은 건 없어요. 그래픽 아트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관련 툴을 여러 가지 다뤄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중요한 건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계속 새로운 걸 원하거든요. 한 가지 영역만 파고드는 아티스트 역시 정말 멋있고 존중하지만 그것만 고집하다가 잊히면 안 되니까요. 그러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딱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색을 찾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하기, 그리고 꾸준히 활동하기. 그 과정을 스스로가 즐긴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픽셀 아티스트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요?
P.P.P를 통한 픽셀 월드의 우주 정복! 세상 모든 사람의 픽셀 포트레이트를 만든다면 우주 정복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