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코미디클럽의 시초
2019년 독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함께 코미디 보는 모임’을 제안해, 멤버를 모았다. 첫 만남에서 누군가 코미디를 직접 하는 것 아니었냐고 반문했고, 이후 돌아가면서 앞에 나와 웃긴 얘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2주에 한 번씩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 삶에서 벌어진 웃긴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모임 이름을 고민하던 중 이왕이면 꿈을 크게 갖고자 ‘동북아국제구술문화연구회’(이하 ‘동북구연’)란 거창한 명칭을 떠올렸다. 멤버 한 명이 주최하는 연말 파티의 한 코너로 공연을 열며 청중을 만나게 되었다.
마이크를 잡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임을 쉬어 가던 때, 미국 뉴욕으로 떠나 코미디 스쿨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워크숍을 들었다. 수강생 모두가 마지막 날에는 공연을 해야 하는 수업으로, 클럽에서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장기 자랑을 열 수 있는 ‘오픈 마이크(openmic)’란 개념을 알게 됐다. 실제로 뉴욕에는 그렇게 열린 무대가 많았다.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마음껏 말할 수 있는데,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연습 자리가 되어준다. 한국에도 그런 무대를 만들고 싶어 동북구연 멤버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서촌의 스튜디오에서 ‘서촌코미디클럽’을 시작했다. 현재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운영 중이다.
수치심을 수면 위로
‘사월날씨’란 필명을 쓰는 친구의 관심사가 수치심이었다. 그 친구와 대화를 하며 사람마다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나 정도가 다르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얘기를 혼자 글로 풀어낼 생각이던 그에게 사람들을 모아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온라인 워크숍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일
부끄러운 일을 반드시 털어놓을 필요도 없고, 유쾌하게 표현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감추는 일에 익숙해지면 외로워지기 마련이다. 가끔은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싶기에. 나도 그런 연유로 시작한 일이다. 정확히는 내 글이 사랑받았으면 했다.
못난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이유
솔직히 ‘나 잘났다’고 하는 얘기보다 못난 모습을 담은 글이 눈길을 끌기 쉽다. 대개의 사람들이 남의 자랑은 듣기 싫어하고, 못난 모습은 어떤 면에서 연민을 느끼고 공감하니까. 일단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어 쓰고, 세상에 보여주자. 가까운 친구를 상대로도 부담스럽다면 익명으로 SNS에 올리는 거다. 나는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이 결국에는 세계 평화에 기여할 거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만 느끼는 감정인줄 알았는데, 아니네?’라며 자신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내 슬픔 거리가 웃음으로 승화되기도 하고.
수치심 마주하기
워크숍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➊ 나는 어떤 어른으로 자랐는가 ‘유년 시절에 어떤 말을 주로 들었는가?’, ‘사회에서 어떤 메시지를 주입 받았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한다.
➋ 나의 두려움은 무엇인가 사회인으로 살며 정상성의 압박에서 오는 나만의 두려움을 살피고, 내 안에 어떤 혐오가 있는지 들여다본다. 두려움과 혐오, 수치심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알아간다.
➌ 수치심 인식하기 앞서 생각한 것을 하나하나 뜯어서 분석하며 내게 어떤 수치심이 있는지 인식한다.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험을 통해 남에게 나의 취약성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의 가면을 벗는 연습을 한다.
➍ 용기 기르기 ‘거절 당하기’, ‘도움 청하기’ 연습을 통해 용기를 기른다. 고통스러운 순간, 과도한 자기 비난에 빠지는 대신 스스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태도를 갖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나만의 강령을 만든다.
소재는 내 안에
우선 마음에 불을 지필 것. 내 경우에는 좋은 콘텐츠를 보면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단 욕구가 올라온다. 이렇게 마음을 예열했다면 내 인생에서 소재를 찾아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등 내 안을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검열과 판단은 금지.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코미디 소재로 합격이다. 예를 들어 존경하는 사람보단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편이 관객이 보기에 재밌다.
유쾌하게 말하기
이야기를 정리한 뒤 친구에게 말하듯 녹음한다. 그런 후 다시 들어보면 어떤 부분이 지루하고, 또 어떤 부분이 웃긴지 분간할 수 있다. 한 번에 완벽한 대본을 쓰는 일은 드물다.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나만의 펀치 라인이 자연스럽게 생겨, 말에 힘이 쌓인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싶을 때 친구들 앞이나 오픈 마이크에 올라 낯선 사람들에게 말한다.
가장 먼저 나를 웃기기
지난해 〈궁금한 건 당신〉이란 에세이를 출간하며 서문에 “남을 웃기는 것보다 내가 웃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썼다. 무엇을 하든 첫 번째 관객은 나 자신이니까 스스로를 먼저 만족시켜야 한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에 정해진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더 깨고 나가는 것뿐이다. 내가 먼저 솔직해지면 상대방도 마음을 열곤 한다. 막상 하고 나면 진짜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