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에서 유학생으로
디자이너에게 유학은 반드시 한 번쯤은 고려하게 되는 이벤트다. 나 역시 디자이너라는 꿈을 꿀 때부터 막연하게 유학의 꿈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의 디자인 스킬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면 ‘한국에서만 공부했기 때문인가’ 싶었고, 자신감이 붙었을 즈음엔 ‘해외에 나가도 잘하는 축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 중인 회사가 글로벌 프로젝트를 주로 하는 곳이라 절반 이상의 선배들이 모두 유학을 다녀온 소위 ‘유학파’ 출신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일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것도 영향을 줬다. 환경으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긴다. 때마침 회사에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해외 석사를 위해 연수 휴직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고, 그 제도를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젠간 유학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커리어에 유학을 더하기
커리어에 갭이 생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리어에 유학의 경험이 더해진다고 생각했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에는 ‘유학’이라는 사건이 내 삶을 통째로 뒤바꿀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기회를 잡게 될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 새로운 버전의 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졸업생은 나의 미래
내가 가고 싶은 학교의 정확한 정보를 최근에 그 학교를 졸업한 이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학교 홈페이지의 소개 글만으로는 실질적인 정보를 얻기 힘들다고 생각했기에 인스타그램에서 실제로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찾아내 DM을 보냈다. 같은 학교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놀랍게도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들에게 전해 들었던 솔직한 이야기 덕분에 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어디서도 얻지 못할, ‘필터링’ 없는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던진 질문
내 인생에서 만족스러운 부분은 무엇이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나의 경우 만족스러운 부분은 대기업의 연봉과 복지 혜택이었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혹시 내가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 그것을 놓친 것은 아닐까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만족스러운 부분을 포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질문했다. 평생 품고 살지도 모를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2년간의 또 다른 불안을 감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배우기 위해 떠나는 일
업무의 심화 과정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학문을 배우러 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분야에 따라, 유학 간 나라와 학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실무와 비교하면 때로는 시간 낭비처럼 보이거나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업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스킬을 배우고 싶다면 찾아가야 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회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학교에선 배울 수 없듯이,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회사에선 배울 수 없다. ‘아, 이걸 이렇게 하는 거 아닌데’라는 자세보다, ‘오, 이걸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의 자세가 배움을 흡수하는 데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갭 이어 체크리스트
충분한 자금, 그리고 그것이 없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충분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버텼다. 여러 번 무너졌으나 결국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꺾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분명한 목적도 중요하다.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경험을 쌓고 무엇을 얻고 싶은지 명료하게 정리해 봐야 한다. 상세할수록 좋다. 목표가 불분명하면 시간은 마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말 것이다.
변수에 대비할 것
예상한 것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물가 상승률도 고려해야 한다. 나의 경우 파트타임으로 벌 수 있는 돈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가스비 폭등, 영국의 인플레이션 등이 크게 작용했다. 다시 복귀했을 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 역시 중요하다. 재취업, 대학원 진학, 창업 등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 두었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그 경우를 벗어나는 일이 해외에서는 발생한다. 더 자주, 더 극심하게.
내 안의 의심과 싸우기
‘이만큼의 비용을 들일 만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인가’와 같은 의심과 싸워내는 것. 나는 셀프 펀딩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매달 다가오는 대출 이자일과 매년 다가오는 대출 연장 심사가 늘 두려웠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으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경제적 부담이 점점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내가 나를 믿어주고, 작은 칭찬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고, 쓰러진 나를 일으켜 줄 주변 사람들을 곁에 두어야 한다.
나를 바꾼 유학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늘 스스로를 의심하던 마음이 ‘나라면 할 수 있지’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만족할 만한 큰 성취는 뒤따르는 모든 성취의 가이드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런던에 있는 동안 스스로의 회복 탄력성을 경험했고, 내가 어느 정도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인지했다. 큰 고난을 겪은 뒤에는 그보다 낮은 강도로 나를 때리는 일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두려움이 사라지니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큰 실패와 슬픔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나 자신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유학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강해지는 방법에 유학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것이 없다. 빠르게 실패하고, 여러 번 실패하고, 크게 실패하기 때문이다.
고민 앞에 선 모두에게
책 <디자이너의 유학> 맺음말에 이런 문장들을 썼다.
“‘떠난다’는 말 자체가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보다 본래 처해 있던 곳을 벗어나려는 의지에 집중해 있다. 그러니 목적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나라든, 어느 학교든, 일단 지금 있는 곳을 떠나보는 행위가 중요하다. 현재 나의 상황에서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는 노력과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보려는 용기가 나를 변화시킨다. 그러니 떠나자. 어디든 가자. 내 마음을 불편하고 어지럽게 하는 곳으로. 스스로가 만든 곤경 속에서 울면서, 상처받으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배우자.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할 것이다.”
그 어떤 신화 속에도 가만히 앉아 주어지는 일에만 나서는 영웅은 없다. 내 삶의 영웅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여정을 짜서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