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쌓일수록, 직급이 높아질수록 나의 욕심과 주변의 기대감도 점점 커진다. 기대에 부응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내가 갖지 못한 능력을 채우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 노력이 언제나 나를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잘 해내야 한다’는 욕심이 불안을 만들어 더 달릴 수 있는 힘을 잃게 할 수도 있다. 김혜원 에디터는 2년 전 팀장으로 승진해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팀장은 무엇이든 잘 알고, 언제든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하죠. 그런데 회사 밖의 저는 허술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느슨해지고 싶다는 갈증이 컸어요.”
작년부터 시작한 달리기 모임에서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거기서는 자신이 초보여도 괜찮았다. 잘 달리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자아를 전환하면 숨통이 트여요. 내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자아를 적시 적소에 온/오프 하는 거죠. 그러면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나 서운함이 쌓이지 않고, 스스로가 꽤 좋아져요.” 그에게 있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을 많이 하고, 많이 받는 것. 그 안에는 나를 사랑하는 일도 포함돼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일상 속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작은 기쁨을 부지런히 그러모은다.
그는 스스로를 ‘기록 광인’이라 부를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기록한다. “기록은 나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최고의 수단이에요. 기록하지 않으면 세세한 생각과 감정들이 하나의 뭉툭한 덩어리로만 기억될 테니까요.”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잊혔으면 하는 일은 제외하고 되도록 좋은 것만 남겨요. 내 인생이니 내 마음대로 편집하는 거죠.”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 일기장에 ‘작은 기쁨’이라는 연재 코너도 마련했다. 그날 인상적인 것을 가볍게 단어로 적으면 하루의 기념품이 된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거나 쓸 말이 없는 것은 우울하다는 위험 신호다.
일기 쓰기를 비롯해 몸과 마음을 고이지 않게 하는 루틴은 ‘할 일’ 목록에 공식적으로 올린다. 업무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다. 이때 스마트폰 앱 ‘투 두 메이트’를 활용하면 편리하다. ‘세수하고 선크림 바르기’, ‘영양제 먹기’, ‘산책하기’ 등 사소한 일도 모두 적는다. 달성하기 쉬워 성취감을 채우기 오히려 좋다. “어디에 있든 이 목록은 저의 기본값이에요. 나다운 루틴을 지키고 나면 아무리 정신없고 바빠도 ‘잘 살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가 20대 때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기록은 꾸준히 했지만 되돌아보지 않아 놓친 것이 많다. 서른 살이 넘어서부터 그는 꼬박꼬박 월말 정산을 한다. 한 달에 한 번 나를 추적하고 리뷰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나’가 유통 기한이 지난 경우가 많아요. 계속해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자신의 이야기는 넷플릭스보다 흥미진진하다. 처음엔 어색해도 한 번 회고를 시작하면 금세 빠져든다.
3년 일기장을 다시 읽으며 그는 성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재작년과 작년 12월의 내용이 완전 달랐다. 한 해 한 해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채워진다. 인생 ‘노잼’ 시기나 세상에 버림받은 것 같은 날에는 ‘좋은 말’ 폴더를 연다. 이름 그대로 친구나 독자에게 들은 좋은 말을 모아뒀다. “다정한 인사 덕분에 인생 전체가 아닌, 오늘이 별로인 것뿐이라는 걸 깨달아요. 위로가 되죠.”
반대로 나쁜 말은 없애는 의식을 치른다. ‘고함 항아리’라 이름 붙인 폴더 속 텍스트 파일을 지우는 일이다. 화가 날 때마다 속마음을 마구잡이로 타이핑한 ‘내적 고함’을 일일이 드래그해 휴지통으로 옮긴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정말 나아진다. “기록과 회고를 통해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갈 법한 것들을 알게 돼요.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것들이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그의 말처럼 행복으로 향하는 비상구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지금 당장 손을 뻗어 문을 열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Interviewee 김혜원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은 덕분에 밥벌이를 하며 산다. 주간지 〈대학내일〉에서 글을 썼고, 지금은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작은 기쁨 채집 생활〉, 〈나를 리뷰하는 법〉 등의 에세이를 통해 일상에서 자신을 돌보고 즉시 행복을 누리는 법을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