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반려견 바우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식물을 돌보며 차를 내려 마신다. 날이 좋을 때는 평소보다 길게 산책을 하는 것이 배현정 작가의 리추얼. 코로나19로 대면 행사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던 때, 바우와의 산책은 유일하고 안전한 외출이자 더욱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마침 살고 있던 집 앞뒤로 여러 개의 트레킹 코스가 이어지는 구간이라 많으면 하루에 두 세 번씩 각각 다른 코스로 산책을 했다. 동네 주변을 걸으면 40분 내외, 트레킹 코스 1곳을 온전히 따라 걸으면 3~4시간이 걸린다. 날이 좋을 땐 평소보다 길게 걷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은 없지만 걷는 건 무척 좋아해요. 지독한 방향치라 여행지에서 길을 잃는 일도 잦지만, 길 잃은 김에 우연히 들른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주문해 먹는 걸 여행의 묘미로 생각할 정도죠.” 주로 먼 곳으로 떠나곤 했던 이전과 달리 집 주변을 거니는 시간이 많아지며 새롭게 알게 된 건 자신이 걷는 것뿐만이 아닌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발견해 기록하는 과정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걷는 행위 자체로 장소를 알아가고 기억하는 과정이 저에게는 꽤 의미있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막상 걷기 시작하면 ‘이 좋은 걸 왜 안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때로는 밖으로 나갈 결심이 도저히 안 드는 날도 있다. 배현정 작가는 그럴 때 바우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운동화 끈을 조인다. 그 외에도 위트 있는 양말을 신거나 좋아하는 문구가 쓰여진 모자를 쓰는 소소한 방법으로 귀찮음을 이겨낸다. 산책하며 발견한 일상의 조각을 기록하는 건 내일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된다. 이름이 궁금한 꽃과 나무, 새, 인상적인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고 낙엽이나 열매를 주워 오기도 한다. 가끔은 수첩을 들고 나가 스케치를 한다. 집에 돌아와 메모장이나 다이어리에 기록하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 몇 가지 단어가 전부일 때도 있고 몇 장씩 이어지는 긴 글이, 한 장의 판화가 되기도 한다. 산책 기록 습관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굳은 결심이 아닌, 산책하다 운이 좋으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벼운 마음이다. “남긴 기록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과 계절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어제는 몰랐던 식물의 이름을 오늘 알게 되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의미가 되었고 안정감도 얻을 수 있죠.”
배현정 작가가 생각하는 산책의 매력은 쉽게 기분을 바꿀 수 있다는 것. 햇빛을 쬐며 걷다 보면 머릿 속에 엉켜있던 것들이 옅어지곤 하는 경험을 했다. 작업이 잘 안풀릴 때도 그 일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대신 물건 포장이나 청소, 미뤄왔던 분갈이를 하거나 산책을 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산책하다보니 자주 만나게 되는 강아지와 고양이, 사람들도 생겼다. 몇 달정도 지나니 함께 걷거나 가볍게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걸어서 그린 그림〉이 완성될 즈음 갑자기 이사를 하게 돼 인사도 못하고 오게 될까 걱정했는데 역시 산책을 하다 만나게 되어 완성한 책을 선물하고 떠날 수 있었다. “모든 외출은 산책이 될 수 있다”는 배현정 작가는 산책이 일상적이고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기록 또한 거창하고 특별한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어디에서나 시작해 보라고 말한다. “완벽한 기록 같은 건 없어요. 단어 하나, 작은 그림으로 시작해 보세요.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산책하고 기록하며 편안하고 충만한 시간을 보내셨으면 해요. 기록은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쌓였을 때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보물상자가 아닐까요?”
Interviewee 배현정
1인 출판사 ‘솜프레스’를 통해 다정한 시선이 담긴 책과 물건을 만든다. 강아지 바우와 산책한 순간들을 담은 그림집 〈Long Walks〉와 판화 시리즈 〈Surroundings〉를 비롯해 총 7종의 책을 선보였다.